데이비드 볼리어의 '애나 칭, <세상 끝에서 버섯> 논평'을 읽고
인간에게 너무나도 당연해서 고작 버섯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세계가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세계이다. 애나 칭은 송이버섯의 생애를 바라봄으로써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이것은 무엇이든 상품화가 가능한 세상에서-심지어 인간의 취미 생활과 관계마저도-우리 삶이 지금까지 어떻게 계속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애나 칭의 송이버섯 연구는 송이버섯이 채집, 운송, 판매가 이뤄지는 상업적 시스템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왜 송이버섯인가? 송이버섯은 애나 칭의 연구 대상이자 인간 세상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자연의 일부인 송이버섯이 채집되어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고 그것이 건강식이라고 찬양하는 누군가에게 판매되는 일련의 과정을 아는 것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 재고하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이버섯은 왜 세상 끝에 있는가? 송이버섯은 황폐화된 공간에서만 자란다. 이 모습이 항상 무언가를 착취하고 또한 그럴 준비가 되어있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는데, 이런 혼돈의 상황을 애나 칭은 세상의 끝이라고 비유한다.
송이버섯이 세상의 끝에서 자라는 것은 불안정성 때문이다. 이것은 송이버섯을 채취하는 사람과도 닮아있다. 이들은 자의로, 혹은 타의로 불안정한 노동환경에서 일한다. 이것은 불안정성 그 자체이자 그것을 상징하는 자본주의에서 생존하려는 몸짓이다. 당연히 법적으로 보호되지 못하는 직업적 환경을 선택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버섯을 따는 사람들은 라오스 피난민, 미국의 퇴역 군인, 떠돌이 빈민 등 제도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이 체계 안에서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이 불안정성은 노동자 보호를 포기한 시스템에서 노동자의 ‘독립성’으로 둔갑한다. 체계적으로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보험과 임금은 제대로 적용되지 않으며, 독립된 노동환경은 당연히 안전도 보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채집된 송이버섯은 어디로 가는가? 북미에서 소비되지 않는 버섯은 일본에서 건강식품이라는 상품으로 판매된다. 누군가는 있는지도 모르는 생물이 상품성을 알아본 누군가에 의해 수익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유통되는 것이다.
버섯 채집가들과 판매업자는 거래 과정에서 만나지 않는다. 애나 칭은 자본주의를 '많은 종들이 때로는 조화도 정복도 없이 함께 사는, 교란을 기반에 둔 상태'라고 설명한다. 아무도 버섯을 둘러싼 사람들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유통과 거래를 하는 행위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송이버섯을 선물용으로 구매하는 사람도 채집가, 유통자, 판매자의 삶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도, 그럴 필요도 없다. 이렇게 '삶'은 자본주의 안에서 소외되고 유동자산이 된 인간과 사물만이 남아 끊임없이 교환된다.
애나 칭은 과거 자본주의를 지탱하던 진보 내러티브는 이런 불안정함으로 가득 찬 패치들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패치는 생산물이 상업 시스템 안으로 끌려 들어오게 되는 분산된 지역들을 의미한다.
애나 칭에 따르면 세상은 온갖 패치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사실 세상은 불안정성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을 성장 패러다임이 가리고 있다는 논지다. 불안정한 것은 즉흥적이고 특이한 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불안정하고 특이하기 때문에 기계에 대응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개별적이고 다양한 특성을 띠는 것을 자본 축적을 목적으로 성장과 진보라는 프레임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상업 체계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 공급망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때로는 비자본주의적인 형식에 의존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대여 플랫폼(에어비앤비, 당근 마켓, 우버)과 사회적 공유에 의존하는 페이스북이 그것이다. 즉, 비자본주의적 형식들과 자본주의적 형식들은 삶이 끼어들 공간을 내어주지 않으면서 정작 이것들은 자본주의의 안과 바깥에서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결국 진보와 성장이라는 미사여구로 꾸며진 자본주의의 민낯은 끊임없는 자본 축적을 위해 시장화되면 안 되는 것마저도 시장화되는, 송이버섯이 살아남으려 애쓰는 ‘세상의 끝’인 셈이다. 애나 칭은 오늘도 도태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삶을 지속하는 우리가 과연 송이버섯과 무엇이 다른지 질문하고 있다. 저자의 이런 다소 냉소적인 비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곧 디스토피아라는 사실을 거듭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