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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도치 Jan 01. 2023

ep.2 내가 문화인류학과에 오기까지

무슨 과세요? 문화인류학과요

사람을 화나게 하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다. 무려 백만 년 전쯤 나는 문화인류학을 소개하겠다는 당찬 포부와 함께 여기에 운을 띄웠다. 그랬었다... 그런데 막상 여기 다니니까 전공 수업이 너무 빡세더라고요? 과제가 너무 많아서 10월 말부터 12월 종강 직전까지 이 4학년 고인물은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려야 했다. 나는 8개의 발표와 2개의 연구 과제, 필드워크, 그리고 시험까지 이 모든 일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 코로나에 걸리고 말았고, 해가 넘어간 지금까지 후유증을 앓고 있다. 격리 기간 중 생각이 많아진 나는 내가 왜 문화인류학을 복수 전공하게 되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어떻게 문화인류학과 만나게 되었는지를 글에 담아보려 한다. 



지난 일을 되새겨보면 나는 그렇게 거창한 계기로 문화인류학과를 지망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계기'는 내가 당시 일상적으로 느끼던 일종의 우울감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학교를 2년 넘게 다녔을 때 찾아온다는 지루함과 불안함은 나라고 예외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수업이 그 수업 같고, 매 학기 새로운 주제를 연구한다는 설렘은 사라진 지 오래고, 그렇다고 딱히 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의 나는 그저 재미있는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극히 유희적 인간인 나에게 새로움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수업은 다 들어가는데 아직 학기가 많이 남았다면 과연 나는 어떤 방법을 생각해 냈을까?


전공을 하나 더 들으면 된다! 재미있는 것으로다가.


그렇다. 비싼 등록금 뽕 뽑으려면 수업을 더 많이 들으면 될 일!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렇게 미친 생각도 없었다. 다른 4학년들이 취업을 준비할 때 나는 공부를 2년이나 더 하겠다는 발상인데 무리수도 이런 무리수가 따로 없다. 그때의 나에게 도대체 왜 그랬냐고 양 뺨을 풀 스윙으로 때리고 싶었다. 복수전공은 잘 생각하고 해야 하거늘...뭐 후회하는 건 아니다. 우리 학교는 학교 특성상 복수전공에 관대한 편이라 우리 과 동기들도 이 제도를 많이 이용하려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복전을 준비했는데, 이것도 다른 학과에 티오가 나야 갈 수 있는 것이라 운이 많이 작용하는 제도였다. 여기서 티오가 많은 학과라는 것은 해당 학과에 이탈자가 많다는 이야기로, 흔히들 말하는 '미래가 전도유망한 학과'와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내가 복전을 준비하던 해에 티오가 많은 학과들은 대부분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계열이었다. 여긴 원래도 티오가 많긴 하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또 별생각 없이 문화인류학과를 지망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문화인류학과? 뭔지는 모르겠는데 이름이... 예뻐!


무슨 편의점에서 바나나맛 우유를 사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이름이 예쁘다'는 이유로 문화인류학과에 지원서를 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이딴 이유로 문화인류학과를 지망하는 분이 있다면... 그 생각 멈춰! 여기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티오가 난다고 다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일단 성적이 좋아야 하고 해당 학과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갖춰야 가능했다. 문화인류학과는 팀 과제가 많은 만큼 누군가와 협업을 해본 경험을 중요시했다. 마침 나는 2학년 때 일본 유학생들과 교류하는 세미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고, 일본으로 연수도 갔다 온 적이 있어서 조건에 들어맞았다. 학점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면접을 잘 보면 붙여준다더라'라는 루머를 믿고 학과 사무실에 서류를 제출했다. 여름에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면접을 본 결과는 당연하게도 탈락이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경험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성적이 모자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하나 모자란 것이 있었으니, 바로 문화인류학 개론 수업을 미리 들어놓지 않은 것이었다. 심사 요건을 잘 살펴보지 않은 것이 패인이었다. (그렇다면 교수님은 왜 나를 면접까지 부른 것일까...? 지금까지 의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계획을 철저히 세웠다. 수강신청 계획을. 좋은 성적은 완벽한 수강신청으로부터 나오니까. 입학한 이래 처음으로 플랜 a, b, c, d까지 만들어 어떻게든 성적이 잘 나온다는 수업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했고, 운과 3학년 어드벤티지가 작용해 수강신청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한 학기는 수업 듣고 전공 관련 책을 읽고 과제를 하고 시험공부를 한 기억밖에 없다. 아 물론 문화인류학 개론 수업을 듣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사실 이 개론 수업에 대해 할 말이 정말 많은데, 이 주제는 나중에 따로 빼서 글을 써볼 생각이다. 


목표가 생기니 잡생각이 없어지고 생활이 단순해졌다. 학교와 집만 오가는 쳇바퀴 같은 생활만을 반복했는데도 마음 한 구석에는 복전을 꼭 하고야 말겠다는 불씨와도 같은 야망이 꿈틀거렸다. 한 번의 실패를 겪고 나니 절박해진 탓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학기는 끝났고, 열심히 산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듯이 내 손엔 4.41이라는 성적표가 들어왔다. 덕분에 자신감을 가지고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면접이라고 특별한 것은 없었다. 사실 교수님에게 질문을 몇 개 받지 못해서 '내가 별로 궁금하지 않으신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도 그날 면접을 보러 온 학생이 3명밖에 없었고 성적이 좋다는 칭찬을 받아서 살짝 기대했는데, 역시 복수 전공의 벽은 높은 것인가 싶었다. 불합격하더라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애써 생각해보려 하던 그때 포탈에 합격 승인이 난 것을 발견했다. 합격이었다! 마음속으로 교수님께 그랜절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ㅠㅠ 공부도 잘 못하는 내가 복수전공을 하게 되다니.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문화인류학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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