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잡>(Bullshit Job) 리뷰
미국 유명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은 매회 폐부를 찌르는 풍자와 해학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중 어느 회차에서 밈이 된 장면이 있다. 호머의 딸 리사는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데, 그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직업이 너무 형편없는 것이다. 그래서 퇴근하고 호머에게 불평을 한다.
리사 "세상에. 그 일은 정말 형편없어."
호머 "모든 직업은 형편없다. 그래서 돈을 받고 그 일을 하는 거야."
역시 우리의 호머 심슨은 어설프게 위로하지 않는다.
호머의 대답은 어딘가 아리송하지만, 한편으로 더 이상 일에서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현대인의 공허한 심정을 단 두 문장으로 압축한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어딘가 쓸데없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쨌든 돈을 받고 있으니 일을 하는, 그런 복잡한 심리 묘사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 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나도 즐겁고, 보람 있고, 또 그에 맞는 대우를 받고 있는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나는 충분히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맛봤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길.
그러나 일을 하며 한 번쯤 '내 직업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걸까?', '이 직업은 왜 존재하는 걸까?', '노동이 진짜 가치가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면,
잘 오셨습니다. 이제부터 그 의문을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해결... 은 못하지만 해소는 해줄 거랍니다!
앞서 호머의 대사를 인용한 이유는 이것이 <불쉿잡>을 통해 저자 그레이버가 말하려는 것을 관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대사를 통해 우리는 현대인의 직업관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은 신성하지만, 모든 노동이 가치 있지는 않으며, 심지어 어떤 직업은 존재이유가 의심스럽다’는 믿음이다. 그레이버는 이 믿음의 근간과 노동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음의 몇 가지 논의를 통해 제기한다.
1. 노동에 절대적 가치 척도란 없다.
그레이버는 먼저 노동에 절대적 가치 척도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노동이 가치 있다는 믿음은 대부분 그 노동이 가져오는 경제적 효과나 임금, 사회적 영향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노동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쉿 직업의 존재 자체는 모든 노동가치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정말로, 모든 가치가 노동에서 나온다는 말은 명백히 모든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말과는 다르다.’(327p)
또 어떤 직업이 타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 것 없이 그저 수요만 창출하는 직업이 과연 가치 있는 노동인지도 질문한다. 여기서 수요만 창출한다는 것은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사람들이 스스로를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느끼게 만들거나, 그들을 꾀어 빚을 지게 하고 이자를 떠 안김으로써 수요를 창출하는 데만 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대다수의 현대인이 노동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원인에는 노동의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구분하려는 습관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을 영어의 Value와 Values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Value는 경제적 가치이고, Values는 그 외의 가치를 뜻하는데, 실제로는 사람들이 이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 개념을 혼재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술가, 운동가, 종교인, 정치인들이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행위가 적발되는 것과 기업가들이 자신의 명예를 챙기고 성실함을 어필하는 행동은 현실에서 노동에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혼재되어 있음에도, 아직도 인간의 인식 체계 속에서는 이 둘이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레이버는 노동에서 사회적 가치를 찾는 인간의 습관은 일관적이지도 않고, 매우 선택적이라고 비판한다. 정말로 모든 노동이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왜 어떤 노동은 보수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어떤 노동은 보수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것일까?
앞에서 호머 심슨이 말한 것처럼 보수는 쓸데없는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이 반대급부에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보수를 적게 받거나, 혹은 아예 받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 또한 널리 퍼져 있다. 이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 성공한 사람에게서 도덕적인 매력과 성실성을 찾으려는 습성이 아닌가 싶다. ‘설마 물질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게으르겠어?’라는 믿음에서 나온 행동 기제인 것이다.
2. 노동이 맞은 4번의 변곡점
중세의 노동 관념-> 자본주의의 도래-> 19세기 노동가치설의 대중화-> 20세기 소비하기 위한 노동
저자는 노동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관점이 자연스레 생긴 것이 아님을 주장하며, 노동에 대한 관점은 인간의 역사에 따라 변화해 왔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아래 4개의 단계로 나누어 노동 윤리의 변화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원래 노동 윤리는 중세 시대에 사춘기에 접어든 어린아이에게 매너를 가르치기 위해 남의 집에서 하인 일을 하도록 시키는 관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프로테스탄트가 노동의 징벌적 측면을 강조해 노동 윤리가 한번 변하게 된다.
두 번째 변곡점은 자본주의의 도래이다. 주로 매너를 배우는 생활 주기 서비스에 따라 살던 청년들은 자본주의의 도입으로 자신의 미래가 될 장인 중심의 길드가 해체되는 것을 목격한다. 길드와 생활 주기 서비스가 미래를 좌우한다는 믿음이 깨진 것이다. 그래서 중세의 청년들은 일찍 자신의 농장을 가지고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룸으로써 기성세대가 정한 사회적 주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런 행동을 두고 당시의 기성세대는 '아직 매너를 배우지도 못하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감히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며 다음과 같이 청년을 비난했다.
‘아주 건방진 10살, 14살, 16살, 20살가량의 소년들이 신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이 여성을 후려 잡아 결혼할 것이다… 얼마 안 가 크나큰 빈곤과 결핍이 자라날 것 같다.’
스텁스 <학대의 해부학>
그렇다면 기성세대는 왜 청년들을 비난했을까?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의 청교도 대부분이 수공업 기능장이거나 빈민을 고용하는 농부였기 때문에, 청년들이 그들에게 종속되어 일을 하지 않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 그들에게는 생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 교리, 즉 ‘노동은 그 자체로 신의 징벌이고 축복이다’라는 또 다른 신념을 개발한다. 그리고 이것은 산업화 시기에 자본가의 착취에 몸살을 앓던 공장 노동자들이 내면화해 노동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라는 프롤레타리아의 신념으로 굳어졌다. 이로써 노동이 부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믿음은 타인의 재산이나 신체를 착취해 부자가 된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게 만들었다.
한편 이 노동가치이론은 19세기에 대중화가 된다. 남북전쟁 직후 미국에서는 관료적이고 기업화된 자본주의가 등장했다. 이에 따라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 부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과 소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경향(즉 소비주의)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게 된다. 즉 부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가 생산하는 것이고, 구매를 통해 타인과 구별 짓기가 가능한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과학적 경영의 도입은 공장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가 노동자 전체를 대표하는 상황을 야기했다. 이 과정에서 공장 노동이 아닌 것들과 여성적 노동으로 간주되는 돌봄 노동은 배제되었다.
노동의 의미 변화는 20세기에 들어 사람들이 소비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이제 인간은 존재 이유를 노동이 아닌 소비에서 찾는다. 바로 취미 활동을 하는 것이다. 따분한 직업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 노동에서의 고통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편에서는 노동을 통한 삶의 구성이라는 명제가 유효하게 작동한다. 이것을 저자는 ‘현대 노동의 패러독스’라고 부른다. 즉,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활동을 하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현대의 노동자는 고통스러운 노동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노동을 아직도 개인의 수련이라고 보는 중세의 관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노동이 고통스러워야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칼라일)
이 주장이 현대에 와서 ‘자기 계발, 자아실현’이라는 명분으로 남아 인간이 노동의 고통을 맛보는 것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교훈을 얻는 대상은 노동 외에도 여행, 인간관계, 취미 활동, 교육 등 다양한데, 왜 하필 그 대상이 노동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그레이버는 질문하고 있다.
이제 호머의 대사를 다시 보자. 그의 말에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노동자의 슬픔을 담고 있다. 그 슬픔은 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 '일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또 다른 가능성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절망을 내포한다. 오늘도 리사는 그저 어딘가에서 바닥을 걸레질하고 있을 것이다. 이 실처럼 이어진 고민의 끝에 드디어 생각하기를 멈추고 걸레질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을 그녀의 표정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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