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스콧 <국가처럼 보기>를 읽고
국가의 권력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재난, 전쟁, 그리고 도시를 개발할 때다. 역사적으로 도시 계획은 특히 19세기 근대화에 대한 선망과 결합해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도시의 큰 그림을 그리는 자-건축가, 행정가, 기업가-가 누구인지에 따라 도시의 미래는 달라진다. 도시 계획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주도하는 쪽이 일단 먼저 진행하고 후에 주민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물론 식민지에서 진행되는 경우에는 그런 설득의 과정조차 없었다. 제임스 스콧은 권력자가 중심이 되는 하향식 개발을 하이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국가처럼 보기>에서 르코르뷔지에의 도시 계획을 ‘완벽하게 이상적인 계획’이라고 소개하는데, 이것은 동시에 비판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도시 설계에 대한 르코르뷔지에의 큰 그림은 당시에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정부의 선택을 받기 힘들었다. 잘 포장된 도로, 정확하게 사각형 혹은 원 모양으로 구획된 주거지역과 상업 지구의 분리, 부랑자와 정신병자가 제거된 거리와 같은 유토피아는 행정가들이 솔깃할 만했지만 결국 재정의 문제로 대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함에 대한 추구가 일으킨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코르뷔지에의 꿈은 브라질리아 개발에서 결국 실현되었다. 바둑판처럼 구획된 잔디, 넓은 사각형 형태의 광장과 양옆을 채운 빽빽한 주택, 쭉 뻗은 도로는 브라질리아를 미래 도시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러나 이곳에 정작 살고자 하는 주민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활동성을 극단적으로 제한한 형태(인도가 전혀 없는 거리, 비효율적인 이동을 초래하는 잔디 등)로 도시가 개조되었기 때문이다. 르코르뷔지에는 도시에서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 형태의 상호작용과 사회적 자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간과했다. 도시의 생동감은 사람의 부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제인 제이콥스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녀는 도시를 활동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보이도록 하는 요소는 누군가가 단순히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요소는 거시적으로 계획자의 관점보다는 미시적으로, 즉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알 수 있다. 도시는 주민의 이동과 그것으로 맺어지는 다양한 상호작용으로 활력을 얻는다. 빵 가게 주인과 아침에 나누는 잠깐의 대화, 세탁소에서 마주치는 주민, 아이들이 뛰어노는 거리, 그것을 지켜보는 엄마들, 북적거리는 시장의 풍경과 같은 이야기는 도시를 한층 다채롭게 보이게 만든다. 르코르뷔지에의 계획은 다양성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다. 도시는 사는 사람의 시선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문득 몇 달 전에 우연히 봤던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LA 다운타운의 스키드 로(Skid Row)라는 거리가 떠올랐다. 이 지역은 과거 19세기 철도역이 있던 곳으로 역 주변에 많은 호텔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후 인구가 유입이 되지 않아 그 많던 호텔은 도시의 부랑자들에게 세를 내주는 용도로 전락했고, 세실 호텔을 비롯한 공간들이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스키드 로는 매년 미국에서 가장 노숙자가 많이 사는 지역으로 변화했다.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발전과 알맞은 기후로 살기 좋은 이미지를 구축한 로스앤젤레스의 이면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제이콥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례는 도시 계획에서 사람들의 사회적 자본 형성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 책은 저자가 도시 계획의 온갖 잘못된 사례들을 들며 시종일관 혀를 차는 모습이 연상된다. 저자가 온몸으로 높으신 분들에게 '제발 이것만은 하지 마세요'를 연발하는 것을 구경하고 싶다면 책이 조금 두껍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도전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