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W짱 Jun 18. 2024

제주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우리 아버지

"내가 고두심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내가 가장 어릴 적 기억하는 아버지 모습은 3살 때 다. 아버지가 택시 정비를 하시고 있을 때 내가 공구 일부를 하수구에 떨어뜨렸다. 물이 '풍덩'하고 튀어 오르는 모습이 신기했다. 하지만 결과는 뻔하게 아버지에게 혼이 났다. 

그 이후 아버지와의 큰 기억이라면 국민학교 4년인가 5년인가 부산에 지하철이 부분 개통이 되면서 동물원에 지하철 타고 여동생, 사촌동생, 아버지 4명이 갔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같이 가시지 않았다. 그때 기억이 유독 나는 이유는 KBS에서 지하철에서 독서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지하철에 무료책을 배포했었고 정말 모두 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밤만 되면 술에 만취해서 집에 들어와서 가족들이 잠을 자지 못하게 술주정을 심하게 했기 때문도 화를 주체 못 해서 폭력을 휘두른 것 때문만도 아니었다. 집에서 담배를 피워대며 단칸방에서 같이 생활하는 우리에게 항상 안개 같은 담배 냄새를 몸에 베이게 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살던 곳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여서 그날 우리 집에서 있었던 일이 온 동네가 다 알게 되는 것 때문도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에게는 모범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외부적으로는 좋은 사람인 모습이 이중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큰아버지들은 모두 공부를 잘하셨는데 자신만 공부를 못했고 중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

그래서 운전기사를 하면서 자신보다 나이 어린 대학 졸업한 사무직에게 무시당한다는 자존심.

사기를 당해서 집을 살 수 있는 돈을 모았음에도 빈 손으로 고향이었던 제주도를 떠나 부산으로 올라와 달동네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이 아버지에게 자존감이 떨어지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인정해 주기를 바라셨다. 직장에서는 노조 활동을 하셨고 대의원 선거에서 일등을 하셨다고 했다. 

자세히는 어릴 때라 모르지만(사실 관심도 없었다) 상대는 극우파고 아버지는 중도에 가까웠던 것 같다. 상대가 여러 번 당선이 되었던 사람이라 가능성이 없을 줄 알았는데 처음 출마에 압도적 표 차이로 당선되셨다. 그때 아버지가 집에 술 마시고 들어와 하셨던 말씀이 있었다. 


"내 친구가 나 보고 '제주도에서 올라온 놈 중에 고두심 다음으로 네가 가장 유명한 놈이다.'라고 했다. 니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냐? 너희들이 술 먹는다고 무시하지. 내가 이런 사람이야!"


솔직히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인생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63세 갑자기 돌아가시고 지금 내 아이가 중학생까지 되었고 내가 중학생이었던 당시 아버지 나이보다도 훨씬 많아진 시점에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이제 이해가 되는 듯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은 제주도다. 나도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2살에 올라왔으니 고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술 담배를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큰아버지들은 장성하여 모두 육지로 올라가 할머니와 두 분이 지내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23살에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당시 모두 그렇지만 변변한 병원도 없던 시절이라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제주도의 특성상 형님이었던 큰아버지들이 오시기를 기다리기 위해 5일장을 하셨다. 하지만 하필 날씨가 좋지 못해 5일이 넘도록 배가 뜨지 못했다. 

아버지가 술 담배를 시작한 시점이 이때였다고 한다. 혼자 할머니 상을 치른 아버지는 서글픔에 술과 담배를 시작했고 항상 할머니를 그리워하셨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정도가 살아왔던 과정과 분명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집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우리에게 서운하셨을 테지만 직장에서 사람들과는 잘 웃고 농담 잘하고 착한 술 잘 마시는 좋은 친구셨다. 

가끔 어린 시절 아버지 회사에 따라가면 주변 사람들이 

"너희 아버지는 참 좋은 사람이다."

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난 속으로 

'집에서 전혀 다른 모습이에요.'

라는 말을 외쳤다. 아버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의 표정은 집에서 볼 수 없는 매우 온화하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싶은 그런 모습.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다만 돌아가시기 5년 전쯤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너무 기대를 하다 보니 심하게 했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풀었다고 할 수 없다. 나 또한 심한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아직 아물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하셨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고 노력하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 다른 가족들 모습이(어쩌면 나의 모습이) 집에서 불만으로 나왔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아버지보다 그리 잘한다고 말을 못 할 것 같다. 

'폭력적이지 않으니까, 딸과 친구처럼 지내니까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면죄부를 줄 뿐이다. 


식구들에게 존경받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다. 하지만 아버지들의 삶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다. 가장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니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당시에 살던 아버지들은 가족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모르셨지만 나름 노력은 하셨다. 회사 생활을 위해 술에 만취하는 것을 이해해 달라고 나름 대화를 시도도 하셨고, 기회가 되면 나들이를 가려고 하셨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인 부분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만일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내 딸이 커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렇지만 자식에게 기대하던 것을 손자, 손녀에게 하게 된다. 오히려 즐거움은 그 기대를 품고 기다리는 과정인 것 같다. 내가 내 딸이 커가는 모습에서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보다 행복함을 조금 더 느끼시지 않으셨을까 생각한다. 


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이라면 내가 아이에게 절대 화를 내면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과 가장의 권한보다는 항상 웃을 수 있는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나의 성실성도 아버지를 닮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나의 절반은 아버지고 또한 그런 나의 절반을 내 딸이 가지고 있다. 지금은 추모공원에서 딸에게 보여 줄 수밖에 없지만 아이를 참 좋아하셨던 모습이 아른 거린다. 


그래도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육지로 올라온 사람 중에 고두심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으셨으니 어느 정도 성공하신 인생을 사신 분이 아닌가.


아버지 열심히 인생 사셨습니다. 존경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미련하게 성실한 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