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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Sep 25. 2024

허연 시선 - 밤에 생긴 상처

허연의 시는 벼려진 칼날같다. 치솟다가도 추락한다. 그가 종종 언급하는 좌표평면의 그래프 같이. 


그의 시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시대적인 흐름을 비판하거나, 사상을 언급하는 시가 아니다. 그저 내면으로 수렴하는, 자기파괴적인, 혹은 지극히 개인의(당신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랑이 그렇다. 때로는 고독이 그렇다. 때로는 자기소멸이 그렇다. 그런 내향적인 모든 이야기들이 깔대기처럼 모여 허연의 시가 된다. 

자기 파괴적인 표현들은 잔인하고 무정해 보이지만 결국 자기연민으로 흐른다. 그러한 이중적인 표현이 아름답다는 생각이든다.


허연님의 시집을 읽고 울었던 날이 있다. 시집을 읽고 눈물을 흘렸던 적은 손에 꼽힌다. 오십미터가 그랬고 좌표평면위의 사랑이 그랬다.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쳤던 감정들을 깨닫게 해주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결국 독자인 나는 허연의 시를 관통하며, 나를 알아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미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 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내가 나비라는 생각

그대가 젖어있는 것 같은데 비를 맞았을 것 같은데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는 노을 앞에서 온갖 구멍 다 틀어막고 사는 일이 얼마나 환장할 일인지


머리를 감겨 주고 싶었는데 흰 운동화를 사주고 싶었는데 내가 그대에게 도적이었는지 나비였는지 철 지난 그놈의 병을 앓기는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살지 않는 것 이 나라에 살지 않는 것 이 시대를 살지 않는 것 내가 그대에게 빗물이었다면 당신은 살아있을까 강물 속에 살아있을까


잊지 않고 흐르는 것들에게 고함


그래도 내가 노을 속 나비라는 생각


# 내 사랑은

내가 앉은 2층 창으로 지하철 공사 5-24 공구 건설 현장이 보였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몰인격한 내가 몰인격한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 당신을 테두리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것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 나의 마다가스카르 3

그날, 동네 하천이 넘쳤을 때, 어머니는 사람들 만류를 뿌리치고 무릎까지 잠긴 집에 들어가 아들이 아끼던 수동 타자기를 들고 나왔다. 난 그날 번지점프를 하러 갔다.


전화기 너머에서 어머니가 물었다. 바오로니 베드로니? 난 대답했다. 아니오 예수입니다. 난 그날 마다가스카르로 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육개장을 퍼먹으며 나는 나의 이중성에 치를 떨거나 하지 않았다. 난 그날 야간비행을 하러 갔다.


나의 소혹성에서 그런 날들은 다른 날과 같았다.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소혹성의 부족들은 부재를 통해 자신의 예외적 가치를 보여준다. 살아남은 부족들은 시간을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슬퍼진다. 어머니, 나의 슬픈 마다가스카르.


# 가시의 시간 1

내 온몸에 가시가 있어 밤새 침대를

찢었다. 어제 나의 밤엔 아무것도 남지

못했고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했다.

가시는 아무런 실마리도 없이 밤마다 돋아 

나오고 나의 밤은 전쟁이 된다.

출구를 찾지 못한 치욕들이 제 몸이라도 

지킬 양으로 가시가 되고 밤은 길다.

가시가 이력이 된 날도 있었으나 온당치 

않았고 가시가 수사가 된 적이 있었으나

모든 밤을 다 감당하진 못했다. 가시는

빠르게 가시만으로 완전해졌고 가시만으로 

남았다. 가시가 지배하는 밤. 가시의 밤.



#밤에 생긴 상처

당신이 사라진 주홍빛 바다에서 갈매기 떼 울음이 파도와 함께 밀려가선 오지 않는다. 막 비추기 시작한 등대의 약한 불빛이 훑듯이 나를 지워버리고 파도 소리는 점점 밤의 전부가 됐다. 밤이 분명한데도 밤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파도만이 남았다. 밤은 그렇게 파도만을 남겼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내내 파도 위로 가끔 별똥이 떨어졌다. 바스락 거리던 조개들의 죽음이 잠시 빛났고 이내 파도에 묻혔다. 소식은 없었다. 밤에 생긴 상처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했다 거진


#좌표평면의 사랑

(좌표평면 같은 아일랜드의 보도블록 위를 노면 전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백 년쯤 된 마찰음이 빈속을 긁고 자본주의는 싸구려 박하사탕을 빨고 있었다)


사랑은 언제나 숫자를 믿어왔다.


사랑은 노래가 아니라 그래프다. 환각의 정도를 나타내는 그래프. 두 명의 상댓값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보여주는 그래프 머릿속에서는 수식이 흐르지만 그래프에서는 눈무링 흐른다. 좌표평면 위의 사랑.


힘들게 찾아온 사랑이라고 힘들게 가라는 범은 없다. 아무리 어렵게 온 사랑도 그래프 위에선 명료하다. 정점에 선 순간 소실점까지 내리꽂는 자멸.


좌표평면에선 언젠가는 모두가 떠나고 새 판이 그려진다. 소중한 것을 너무나 빨리 내려놓는 재주. 이곳의 미덕이다.


계절풍이 불었다.


#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사랑이 끓어넘치던 어느 시절을 이제는 복원하지 못하지. 그 어떤 불편과 불안도 견디게 하던 육체의 날들을 되살리지 못하지. 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물도 버리게 하고, 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


그래도 약속한 일은 해야 해서

재회라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때맞춰 들어온 해갈에 절반쯤 어두워진 너, 수다스러워진 너, 여전히 내 마음에 포개지던 너.


누가 더 많이 그리워했었지.

오늘의 경건함도 지하철 끊어질 무렵이면 다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서로 들고 왔던 기억, 그것들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것이 저주였음을.


재회는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아니었음을.

오래전 노래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 처음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기를

지금 이 진공관 안에서 끝끝내 중심 잡기를.


당신 , 가지도 말고 오지도 말 것이며

어디에도 속하지 말기를

그래서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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