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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Nov 04. 2024

사춘기 - 조행숙

서평의 첫걸음

  복잡한 내면의 모습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화자가 이곳에 있다. 조행숙님의 시가 그러하다. 아이들이 화답한다. 여자가 운다. 귀신은 웃는다. 아이가 속삭인다. 사회나 민담에서 변두리를 차지하는 아웃사이더들의 독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무의식의 발화도 주체의 자리에 오른다. 그래서 때로는 섬뜩하다. 불연속적인 문장과 화자의 경계가 없는 대화 형식의 시들은 우리에게 묘한 불안감을 선사한다.      

  그 중, 시집을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몇 개의 시를 예시로 들어 감상평을 적어보고자 한다.     


매일 밤 나는 눈을 감지. 그리고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았네. 어떤 소리가 새어 나갈지 알 수 없었네. 나는 놀러 다녔어. 나는 취미도 개성도 없지 

–중략-     

내리는 눈은 금세 구멍을 메우네, 세상은 여전히 덮여있고, 점점 깊어지지. 매일 밤 나는 눈을 감으면서 세상이 덮이는 걸 느끼지. 그렇게 감춰지고,     

나는 오래간만에 눈을 뜨니까 매일 어리둥절해. 그리고 눈곱처럼 떼어놓아야 할 게 있다고 느끼지.     

『기억은 몰래 쌓인다』 중     


  『기억은 몰래 쌓인다』에서 화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나간다. 마치 자기의 개성이 없는 것이, 취미가 없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객관화한다. 그 속에서 화자의 냉소를 읽었다. 냉소로 감추어질 수 없는 외로움과 추억에 대한 그리움도 말이다. 화자의 눈곱 같은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밤이 되면 자꾸만 쌓이는 기억의 파편이었을까.     


아이들은 소음 덩어리지. 어디를 눌러도 삑삑거려. 그러니 아이들 사이로 어떤 소리도 제대로 샐 수가 없지. 여긴 안전해

나는 우는 아이들을 주워다 키우지

-중략-     

마음껏 더럽히렴. 나는 멍청히 우유를 타는 여자일 뿐이고, 너희는 아직 울어도 좋을 때란다. 너희들은 한 덩어리지. 

울기 부끄러워지면 어서 나가렴, 너희는 울고 있는 미아란다.

『천국의 아이들1』 중


  차가운 보육원의 바닥이 생각났다. 그 누가 울어도 돌아봐 주지 않는, 필요에 의해서만 어른의 품에 안겨지는 덩그러니한 무리의 아이들 말이다. 또는 화자의 지난 시절에 대한 회환이 아닐까 생각한다. 울고 있는 아이들에게 무표정과 무감정으로 ‘너는 미아’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화자는 이미 지친 듯하다. 어쩌면 모든 에너지와 감정을 소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주체를 정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읽는 이의 참여를 유도하여 ‘나’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어째서 이 화자들은 이토록 무심하고 잔인한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는 것일까. 화자는 아이를 키우면서 혹은 아이들을 돌보면서 마주 보았던 화자 밑바닥의 모습을 알레고리로 사용하여, 인생의 냉담함을 전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화자의 불연속적인 발화와 계속되는 화자의 교체는 시집 전체의 흐름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편한 슬픔은 계속된다.      



나는 거의 도달한다 이젠 무엇에 대한 의식을 끄고 싶다 정전.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일정한 밝기로 감동하고 싶지 않다 약속한 장소에 가고 싶지 않다 정전.

아주 늦게 가서 그가 남긴 분통에 미지근한 물 부어주고 싶다 이해해.

이젠 잠시 정전 하고싶다 그런데 잠이 안오네.

스위치스위치스위치스위치스위치.... 나는 거의 도달한다.

반복이 잠을 불러올 것을 경험으로 안다고 나는 매우 지루하다 정전.     

너무 많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구겨진 은박지 같아 나는 뒤척인다.     

『두개의 전선』     


  ‘불면’이라고 제목을 바꿔도 좋을 만큼 은유와 환유를 사용한 시이다. 행 끝에 정전. 이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붙이며 리듬을 단절시킨다. 마치 정말 정전이라도 된 듯하다. 숱하게 뒤척인 밤의 날을 보냈었다. 달이 남중고도에 올라갔다가 기울여지는 모습을 뜬눈으로 바라보았던 나는, ‘구겨진 은박지 같아’라는 표현을 보고 코가 시큰해졌다. 화자는 어떤 심정으로 늦게까지 기다린 그 사람의 머리에 미지근한 물을 붓고 싶었을까. 화자와 함께 나도 마음의 스위치를 껐다,켰다를 반복했다. 약속한 장소에 가고 싶지 않았다. 화자의 말처럼 흩어지는 자에게 삶은 무의미 할지도 모르겠다.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아이와 여자, 귀신은 이미 흩어지고 있다. 그들의 흩어짐에 의한 엔트로피 증가가 자기파괴를 가져올 것이다.     

 불현듯 사춘기의 감정이, 내가 어머니일 때의 감정이, 나의 정신이 흩어질 때의 감정들이 몰려온다. 이 불연속적인 화자의 발언 속으로 우리는 그런 느낌을 천천히 떠올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김행숙님의 시들은, 일상에서 포착할 수 있는 사소한 순간들까지 은유와 환유로 탈바꿈 시키고 있다. 개인의 독백처럼 보이는 이 냉소적인 시들은 결국 내면의 충돌을 와해시키기 위한 외침이 아닐까 생각 한다. 

  

그러므로 화해하는 것이다. 나와 내가. 너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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