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Oct 25. 2024

그릇


A와 B가 친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야기다. 

어느 날 A는 같이 쓰던 그릇 10개를 한 자리에서 모두 부수었다. 

B가 이유를 물었다. A는 조각을 찾아 꿰어 맞춰 이어 붙이면 된다고 항변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릇 몇 개를 깨뜨린 것이 무엇이 대수냐고 반문했다. 

그 접시와 그릇들은 B에게 특별한 것이었다. 직접 빚은 그릇들도 있었고, A를 생각하며 구입한 소중한 그릇도 있었다. 몇 날 며칠을 서글퍼 울었지만 A는 고작 그릇 때문에 괴로워하는 B를 힐난했다.

B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유난인지에 대해. 그릇이야 다시 사면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A가 그릇을 깨뜨린 것은 정말 우연이 었나에 대해.

하지만 깨져버린 그릇의 파편들은 B의 심장에 와서 모두 박혀버렸다. 


A와 B가 친구가 된 지 몇 년이 흘렀을 때의 이야기다.

A는 여전히 종종 그릇을 깨뜨렸다. 그중에는 정말 별것 아닌 그릇들도 있었다. 매번 손에서 미끄러졌다고 말하는 A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이미 10개를 한 번에 깨뜨린 적이 있으니, 한두 개 정도를 이해하는 일은 별 것 아니었다. B는 생각했다. 용서하는 것은 나의 선택이구나. 용서했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 할 수는 없구나. 그릇을 아끼는 내가 유난이구나. 하지만 웃음을 잃는 일이 잦아졌다. 


A와 B가 친구가 된 지 십수 년이 흘렀을 때의 이야기다

B는 찬장의 그릇을 꺼내 모두 부수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릇이 쓸모없게 느껴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부수고 싶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는 일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자학이어도 상관없었다. 그릇을 부시는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릇이 깨질 때마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 A는 경악했다. B가 깨뜨린 그릇에 자기가 소중히 여겼던 그릇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A는 B를 힐난했다. 모르고 부순 나보다 네가 더 나쁘다고 했다. B는 항변하기를 포기했다.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릇을 일부러 깨뜨린 이유에 대해, 그릇이 깨질 때에 얼마나 즐거웠는지에 대해 일일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미안하다고 했다. 그것은 일종의 자포자기였다. 


A의 비난과 원망에 B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도적인 행동이 정말 잘못이었는지에 대해. A는 몇 날 며칠에 걸쳐 B를 탔했다. B는 십수 년 전과 현재가 다른 게 무엇이냐 물었지만 A는 함께한 시간에 쌓인 믿음과 신뢰에 대해 운운했다. 그런 것이 존재했었나 B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A는 이번일을 계기삼아 B를 '을'로 변모시켰다. B는 낙담했다. 변명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우스웠다. 결국 그릇의 양은 제로였고, 나에게 남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조금씩 지우기로 마음먹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가장 편리한 방법이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비난은  그 누굴 원망하는 것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남은 것이라고는 B의 껍데기뿐이었다. 그저 A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24시간 웃어야 했고, 새로운 그릇을 하나하나 허락 맡고 사 오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B는 사실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