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내 모습도 기록하고 인정하기.
입사하고 약 3주간의 교육이 끝났다. 09시부터 18시까지 교육만 듣는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힘들긴 했지만, 대학교에서는 등록금을 내고 들었던 수업을 지금은 월급을 받으면서 듣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피곤하긴 해도 기분은 해피했다. 그리고 드디어 교육이 끝나고 부서 배치가 정해지던 금요일. 함께 3주간 교육을 들었던 동기들이 각자 배치받은 부서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기분은 마치 군대에 막 입대했을 때 훈련소 교육이 끝나고 자대 배치받는 기분이랄까... 동기들이랑 각자 부서가 나눠진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많이 아쉬웠다. 사실 말을 안 해본 동기들도 있지만,, 내적 친밀감을 무시할 수 없나 보다.
그렇게 부서 배치를 받은 금요일,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3주 동안 느꼈던 감정들을 정리해 봤다. 정말이지 여러 감정들이 피어나고 시들기를 반복하며 마음속에서 구름처럼 떠다니던 감정들을 명확하게 글로 정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거 같지만, 기록을 남겨본다.
3주 동안 느꼈던 감정을 정리하자면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로 정리할 수 있을 거 같다. 최근 읽었던 책 중 기억에 남는 책이 바로 박후기 시인의 책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인데, 지금의 내 감정을 이보다 더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거 같다.
집으로부터 멀고 바다로부터 가까운 곳에
구멍 같은 술집 하나쯤 찾아내
먼지나 은둔자처럼 조용히 깃들이고 싶을 때가 있다.
살다가 하루쯤은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이 있다.
가끔 시詩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이 있다.
자리를 바꿀 때마다 바꿔 써야 하는 가면을 벗고 싶은 날이 있다.
살다가 하루쯤은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그런 날들이 있다.
사람아, 네가 올 때마다 내가 흔들린다.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_박후기
솔직한 마음으로, 40 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회사에 입사했다는 사실에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거 마냥 자만감에 빠져서 그동안 잔뜩 거만해져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 입사하고 동기들과 함께 교육을 듣고 실습과 발표를 하며 동기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런 동기들을 보면서 그동안 거만한 태도를 가졌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잔뜩 거만해져 있던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달까. 그리고 부서 배치를 받고는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잔뜩 긴장해서 미어캣 마냥 무슨 소리만 나면 혼자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피기 바빴다. 심지어 인사조차도 똑바로 못하는 모습이 스스로 얼마나 바보 같던지...
같은 부서 선배 : 안녕하세요 누구누구입니다~ 서버 접근하는 거 알려드릴게요.
고장난 길민석 : 네! 안녕하세요 신입사원입니다.......
하. 하. 하. 하. <안녕하세요 길민석입니다> 도 아니고, <안녕하세요 신입사원 길민석입니다>도 아니고.. 대화 맥락 무시하고 <안녕하세요 신입사원입니다.> 라니 다시 생각해도 멍청해 보인다.
일기를 매일 쓰지는 않지만, 마음이 무거울 때 종종 쓰고 있다. 그렇게 일기를 쓰다 보면 내가 왜 거짓말로 나를 포장하고 있는지, 느낀 감정을 왜 솔직하게 기록하지 못하는지 이상했다. 더 이상 거짓말로 일기를 쓰지 않겠다 다짐하고, 그렇게 쓰고 있다 믿었는데 어느 순간 다시 읽어보면 내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 인간이기에 멋있고 인간이기에 추한 건데.. 마치 나의 일기장은 추한 나의 모습은 내가 아니라며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_ 2022년 1월. 길민석 일기장
앞으로 사회초년생으로 일하면서 초라해지고 혼나는 일들이 정말 많을 거 같다. 초라한 그 순간들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기록하고 싶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양분 삼아 성장하고 싶다. 지금의 이 감정을 잘 기억해 두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쭈굴하게 초라해지지 말고 당당하게 초라해져야겠다. 신입사원일 때 초라해질 기회를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