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청년마을, '병영창작상단' 전지윤 대표 이야기
네덜란드식 담벼락이 줄지어 있는 강진 병영면은 조선에 표류하게 된 네덜란드인 하멜의 아름다운 흔적이 남아있는 동네입니다. 수세기를 넘어 2022년, 도시에 살던 청년들이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병영의 상단 역사를 청년의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해 창작 활동을 하고 더 나아가 강진에 없던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고 있는 전지윤 대표입니다.
Q. 창작을 위해 강진에 내려온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원래 서울 바라기여서 열심히 노력해서 서울로 대학을 갔어요. 무역학을 전공하다가 ‘이 전공으로 좋은 곳에 취업은 할 수 있겠지만, 여자로서 계속 내 일을 지켜 나가는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며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것들로 생각의 방향을 틀었어요. 그때 처음 저의 ‘말하는 능력’을 단순히 프리젠테이션 잘하는 것, 대화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장점 이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강의하는 모습을 떠올렸고요.
그 후에 ‘무엇을 강의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는데요. 나의 철학이나 색을 확실히 입힐 수 있을 것, 진입장벽은 높지만 그만큼 판에 들어갔을 때 지속가능성도 높은 것 등을 두고 고민하다가 학부 때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미술사라는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바로 강의를 시작했죠. ‘넥스트로컬(Next Local)’이라는 지역연계형 창업지원사업에 도전하게 되면서 사업자를 내고 강진에 내려오게 되었어요.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예술가’ 보다는 ‘창작자’ 표현을 더 좋아해요. 저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들을 선택하고, 또 이걸 자기 스타일대로 실현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창작자라고 생각해요. 제가 가진 이 ‘창작’이라는 개념과 전공했던 예술, 인문학 분야를 결합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술 치유, 아트테라피 강의와 프로그램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 자유를 중요시 여기시는 것 같은데 창작자로서 활동이 그럴 것 같아요.
네. 요즘 ‘행복론’을 유심히 보며 공부하고 있는데 최근에 읽었던 한 교수님의 논문에서 ‘행복에는 ‘자유’, ‘유능감’ 그리고 ‘관계’ 이 세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문장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생각해보면 저는 우선 삶에서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걸 가장 상위 기준으로 저의 업을 찾았었고, 그렇게 찾은 창작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유능감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순간들을 정말 많이 누리고 있어요. 관계라는 요소는 최근 로컬로 이주해 오면서 저만의 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 중 한 분야인 ‘아트테라피’도 ‘관계’와 연결이 깊어요. 인간관계라고 하면 보통 타인과의 관계를 많이 생각하는데 저는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은 ‘나와의 관계’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끌어 나가는 청년마을인 병영창작상단은 물론이고 청년마을 운영주체인 ‘아트 랩소디’에서도 이 부분을 제일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요.
그래서 지역에 내려와서도 생애 주기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와의 관계를 중심에 둔 다양한 예술 경험의 장들을 가장 먼저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지역 안에서 늘 화두가 되는 세대 간, 세대 내 갈등들에 접근하는 예술 프로그램들로 확장시키기 시작했고요. 일반적으로 예쁜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원데이 클래스보다는 관계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사유하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았던 다양한 시각 예술 재료들을 활용해서 그 사유의 과정을 표현하고 작업물로 완성해 보는 활동들을 하고 있어요.
Q. “예술을 통해 창조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라는 말이 좀 더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나와의 관계 회복에 이어 보통 사람들이 ‘회복’, ‘힐링’, ‘테라피’, ‘치유’라 하면 정적이면서 수동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데요. 저는 ‘그게 과연 진짜 힐링일까?’ ‘왜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만 회복하려고 할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결국 회복, 치유라는 건 ‘나답게’ 일상을 잘 살아가기 위함이고 그게 진짜 본질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더욱더 그 과정은 주도적이어야 하고 창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이 들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창조적 회복을 직접 경험해본 개개인이 모이면 그 공동체는 정말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걸 증명해낼 탄탄한 증거들, 그러니까 진짜 현실의 레퍼런스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창작상단의 1년 차 미션이었습니다.
Q. 병영면이 개인의 취향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병영 상인들이 살았던 이 동네는 집집마다 높은 담벼락과 감나무가 있는 개인 정원이 있을 정도로 잘 사는 마을이었어요. 그때 당시 병영성을 드나드는 말 타고 군사들에게 집 내부를 보여주기가 싫어서 담벼락을 높게 쌓았다고 하는데요. 이런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병영면을 어울리기 어렵거나 폐쇄적이거나 각자도생 하는 마을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각자의 개인 영역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연스러운 동네로 느껴져서 좋았어요.
Q. ‘병영창작상단’ 청년마을은 어떠한 방향성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병영에는 병영 상인들은 물론이고 제주도에 표류되었다가 이곳으로 끌려왔던 네덜란드의 하멜 일행들도 6-7년 정도 살았어요. 저는 결국 이 마을에 흐르고 있는 서사의 맥락에 중심에는 상인, 상단의 역사가 있다고 생각해서 컨셉을 ‘상인’으로 잡았어요. 상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어떠한 물건의 잠재력을 볼 수 있으며 매력적인 것들을 발굴할 수 있는 디테일한 눈을 가졌다고 생각을 해요.
재미있게도 이런 상인들의 특징은 21세기 우리 또래 창작자들이 가진 장점이기도 해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창작을 예술에 한정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서 ‘여기서 창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확산시켜보자!’는 생각으로 다양한 것들을 시도하며 한 해를 보냈어요.
Q. 하멜의 서사와 지금 청년들과의 이야기 혹은 대표님이 만들어 나가고 싶은 청년 마을의 모습이 어떠한 공통점이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제가 병영에서 주민분들을 많이 만나면서 한 3~40년 전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어요. 그 시절 동네에 하멜의 후손인 ‘남씨’들이 있었는데 막노동을 하며 어렵게 생활했고 무엇보다 본인들이 하멜의 후손이라는 얘기를 듣는 것을 싫어했다고 해요. 하멜 일행들이 처음 왔을 때는 아마 더 힘들었을 거예요. 실제 기록을 보면 온갖 고역으로 힘들어서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술과 춤으로 삶을 달랬다고 해요. 그걸 마을 사람들이 보고 따라 추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그런 풍경들이 벌어지곤 했죠.
그렇게 하멜 후손들이 병영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며 담벼락 축조하는 방식을 알려줬는데 만드는 과정에서 언어가 잘 안 통하기도 하고, 한국에 있는 재료들로 대체하면서 담벼락을 쌓게 되니 병영만의 독특한 돌담길이 만들어지게 된 거죠.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에는 그렇게 탄생한 돌담길이 독특한 마을 분위기를 만들면서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마을로 불러들이고 있어요. 하멜과 그의 일행들이 마을에 남긴 담벼락이 아직까지도 유의미한 영향을 주는 것처럼, 21세기에는 청년들이 이곳에 와서 본인들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서 ‘담벼락’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며 마을과 함께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때의 병영 사람들과 지금의 병영 사람들이 다르고, 그때 이주해 온 하멜 일행과 지금 이주해 오는 청년들이 다르니 우리는 또 다른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병영을 상상하게 되었어요.
Q. “부담스러운 관심도 배타적인 경계도 아닌 적당한 배려가 자연스러운 강진에서 관계를 다시 배웠다”라는 말을 하셨어요. 그 의미가 궁금합니다.
지역 주민분들이 실제로 관심을 많이 가지고 궁금해하세요. 저희가 공간에 있을 때 약간 경계하시기도 하시면서 기웃기웃하시고 쳐다보시지만 그 와중에 ‘우리가 과할까? 좀 이상하게 생각하려나? 아니면 혹 상처가 될까?’ 이런 부분들을 항상 먼저 생각해 주신다는 걸 늘 느껴요.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여기 쓰레기 버리는 곳은 아나 싶어서~”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시며 다가와요. 당당하게 “궁금한데 얘기 좀 해 줘 봐요.” 이렇게 하실 수도 있지만 당신들의 호기심보다 마을에 이제 막 적응하기 시작한 청년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시는 데에서 배려를 느꼈어요. 실제로 저는 흔히 말하는 지역의 텃세보다는 오히려 ‘밥도 같이 먹자!’하는 말들을 더 많이 들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 케이스여서 아직은 스스로 타인과의 관계에 서투르다고도 생각할 때가 있는데요. 적정 수준의 관심과 관계 같은 것들을 지역 내려와서 더 많이 경험하며 알아가고 있어요.
Q. 지역 주민들의 포용하는 분위기와 또 비즈니스 연계를 잘해 주신 부분에서 많은 청년들이 정착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즘 휴학, 인턴, 석사 등의 이유로 졸업이 늦어지는 친구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은데요. ‘내 또래 친구들에게 청년이라는 시기에 주어지는 선택지는 과연 몇 개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역시 강진에 내려올 때 이런 현실적인 부분 때문에 과감하게 정착은 생각도 못했어요. 하지만 딱 그 시기에 지역 내 학교, 청년정책과, 도시재생 등 주체들과 일을 해볼 수 있는 작은 기회들을 경험하면서 ‘이런 주체들과 일을 할 때는 내 일을 변형할 수도 있구나 ‘를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 과정은 제가 로컬에서의 새로운 삶을 결심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중요성을 지자체에 많이 어필했고 실제로 올 한 해 병영창작상단을 찾은 친구들은 삶의 현실적인 대안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들을 아주 잘 활용하고 또 확장할 줄 아는 친구들이었어요.
Q. 이를 위해 특별히 신경 썼던 프로그램이나 대표적인 활동은 무엇이었나요?
첫 번째가 ‘프리뷰 창작상인’이었어요. 보통 ‘로컬 투어링’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지칭하는 것 같아요. 저희는 청년마을 운영주체인 아트랩소디가 일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각 권역별로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지역청년들을 진행 호스트로 세웠어요.
호스트 각자가 지역에서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하고 있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비즈니스를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지와 같은 이야기들이 지역 내 작은 권역들의 이야기와 함께 전달되기를 바랐거든요. 강진에서 나고 자란 청년, 잠시 나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 연고는 없지만 귀농귀촌한 청년들이 각자의 현 시점에서 조금 더 현실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려주길 바랬어요. 지역살이 프로그램 참여 청년들이 이후에 창작 상인으로서 강진에 살게 되었을 때의 예고편을 보는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고요.
실제로 이 창구를 통해 많이 연결되더라고요. 저 또는 ‘창작상단’과 기본 연결고리가 만들어지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최소 6~7명의 청년 호스트들과 다양한 정서적인 관계가 겹치고 겹쳐지면서 관계와 기회는 확장되고 소속감과 마을에 대한 애착은 더욱 깊어진다고 느꼈어요.
Q. “방랑하는 청년들의 이야기가 마침내 정착하는 곳” 이 표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주’라고 하는 속성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과거에 병영의 보부상들도 이곳저곳을 누볐고, 병영에 머물렀던 하멜 일행도 넓은 세상을 누볐죠. 요즘 우리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상경하거나, 직장을 위해 다른 곳으로 삶터를 옮기거나 다양한 형태로 외국을 오가며 생활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이주’라는 단어 아래 묶여요. 그래서 이 부분이 ‘방랑’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Q. 강진에서 새롭게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핫한 디자이너들이 오는 프랑스 디자인 워크숍 ‘보부쉐(Boisbuchet)’를 모티프를 가지고 와서 한국에서 예술 워크숍을 열어 새로운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보부쉐 워크숍은 매년 프랑스 작은 마을에 있는 한 고성에서 ‘디자인’이라는 공통 키워드 아래 매년 다양한 사람들을 모으고 다양한 시도를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주체들의 가지각색의 시도들은 아주 기상천외하고 각양각색의 작업물로 탄생하는데 이게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또한 여기서 중요하게 봤던 부분은 사람들이 주어진 주제나 미션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도 드러난다는 점이었는데요. 저희는 이 맥락을 갖고 와서 디자인이 아닌 예술 치유로 풀어보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첫 해 워크숍의 주제는 ‘회복탄력성’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조금 전형적일 수 있지만 쉬운 말로, ‘행복’이라는 주제로 확장되었고요. 이 주제를 새롭게 조명하여 자신의 삶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청년 ‘창작자’들이 워크숍의 리더 혹은 참여자가 되어서 본인의 서사를 풀며 새로운 작업의 전환점을 경험한다면 이들의 삶에서 병영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 함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Q. 강진만의 유무형 자원들은 무엇일까요?
‘예술 치유’라는 도구를 가지고 지역의 이야기를 제 관점에서 조명하여 ‘창작상단’이라는 청년마을이 탄생한 것처럼 앞으로 이곳에서 청년들의 관점과 지역이 만들어내는 새로움의 레퍼런스들은 훨씬 더 많아질 거예요. 강진에서는 ‘다산의 정신’ 이런 현수막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지역 주민들에게는 이토록 낯익은 것들이 외부에서 온 청년들에게는 특별하거나 독보적인 시작점으로 다가오거든요. 실제로 저에겐 정약용이 이곳에서 남긴 많은 저서들을 물론이고 마을의 6070대 어르신들의 30~40년 전 이야기들도 모두 굉장히 매력적인 자원이고요. 이 모든 것들은 너무나도 귀한 창작의 재료예요.
앞으로 좀 더 많은 청년 창작자들이 이런 자원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어느 마을에나 있을 것 같지만 어느 마을에도 없는 이야기들로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행사 그리고 에세이 등으로 재해석하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지역에 축적되어온 것들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창작 스피릿’을 가진 청년들이 감동하여 새로운 품을 들이기 시작하면 다시 깨어나서 놀라운 일들을 해내기 시작해요. 그리고 저는 그런 일들을 우리 창작상단이 해낼 거라고 생각하고요.
Q. 폐 공간을 드디어 오픈하셨어요.
이 공간은 시장 한가운데에 계속 비어 있는 상태였는데요. 청년마을을 하게 되며 저희가 공간을 기획할 수 있었고 ‘남상객잔’이라는 거점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다 갖춰진 상태로 완벽하게 해낼 수 없으니 작은 실험들을 다 해볼 수 있는 공간을 기대하며 만들었어요. 도시재생에 ‘DIT’라는 재밌는 개념이 있어요. ‘두잇 투게더Do It Together’의 줄임말인데 마치 이 단어처럼 우리가 지역에서 해결하고 싶은 문제를 실현 가능한 사이즈부터 함께 하나씩 실천해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더불어 이 공간이 병영으로 들어가기 전, 중간지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졌으면 했고요. 그래서 마치 해리 포터가 호그와트 가기 전에 비밀의 문을 통과해서 가는 것처럼 여기까지는 현실 세계지만 통과하면 ‘어나더랜드(Another Land)’로 갈 수 있다는 컨셉으로 만들었어요.
‘어나더랜드’는 내년부터 우리가 만들어나갈 청년마을의 이름이에요. 그 청년마을을 만드는 주체가 ‘창작상단’이고요. 우리가 급이 다르다고 할 때 ‘어나더 레벨(another level)’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이런 표현에 더해서 독특한 병영의 풍경과 분위기를 떠올렸을 때 마치 뭐든 해볼 수 있는 꿈과, 상상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어 ‘랜드(Land)’라는 단어를 선택했어요.
Q. 앞으로 병영면에서 이루고 싶은 꿈과 계획이 궁금해요. 청년마을이 어떤 마을로 성장하고 발전했으면 하시나요?
소위 청년이라고 했을 때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청년' 고유의 속성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흘러가듯이 잘 살아가는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나더랜드는 그대로 자체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운영되면서 지역에 온 청년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한 베리에이션 (variation)들이 시작되는 기반으로 역할을 하게 될 거예요. 자연스럽게 ‘브랜더brander’들이 모이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희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브랜더 소사이어티(Brander Society)’인 이유도 다 여기에 있어요.
마지막으로, 저희를 꼭 지켜봐 달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어요. 이상적이다, 꿈꾸는 게 유토피아 뺨친다는 얘기 참 많이 듣는데요. 가지각색의 주체성과 관점이 살아 움직이고, 또 존중되는 곳에서 그런 문화를 만들어가는 주체들이 과연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는지 기대하는 마음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