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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Dec 17. 2023

부안 내소사에서

휴식(休息)

요일 이른 아침이다.


지평선이 보이는 여기 호남평야를 안개로 볼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안개 자욱한 일요일, 차들이 드문 이른 아침 거리를 한참을 달려오니, 이제 그만 멈추고  좌회전을 하라 한다.

길들이 다들 예쁘다.

거기다 안개까지 스며드니 더 예쁘다.

신호를 따라 또 한참을 달려 일찍 와 급히 주차를 한다.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한지는 잘 알고 있다.

20년 전쯤 첫째 아이가 겨우 걸음마를 할 때 유모차를 끌고 거닐었던 그 전나무 사잇길을 오늘 또 걷고 싶어서 일거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 있네!!

(김광석, 바람이 불어오는 곳 중에서)


꿈에 보았던 그 길, 그 길 위에 다시 또 서 보고 싶은 욕심에 일요일 이른 아침 급하게 달려왔다.

욕심보다는 설렘이 더 맞을 것 같다.


여기는 그냥 편안한 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걷고 싶은 전나무 숲 사잇길이 있는 전라북도 부안(扶安)에 있는 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다.

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

 래(來), 되살아날 (蘇) 이렇게 내소사다.

오면 되살아날 수 있는 절이 내소사 인 것이다.


세상사 모든 번뇌를 씻고 진리를 향한 일심(一心)을 상징한다는 일주문(一柱門)을 지나면 바로 왜 여기 '오면 되살아날 수 있는지(來蘇)' 알 수 있게 만드는 전나무숲 사잇길들이 자신 있게 일깨워준다.

아까울 정도로 이 숲길이 좋아, 느릿느릿 걷는다.


나이가 들어도 늘 빠른 걸음이다.

그래서 그 걸음 속도만큼 시간이 빨리 흐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

지금처럼 여기 이곳 향기로운 숲길을 걷다 보니, 조급한 마음들이 시간을 더 빨리 가도록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릴 때는 하루가 참 길었었는데, 지금은 1년도 금방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마도 조급한 마음, 또 수많은 욕심들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 숲향은 향기 가득하다.

고 날카롭게 찌르는 향이 아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스는 그런 향이라 더 깊게 스민다.


일요일 이른 아침이라 붐비지도 않고, 거리를 감싸던 짙은 안개도 걷히니 한결 가볍다.

물론 안개 낀 이 전나무 숲길도 예쁠 것 같지만, 여기 도착하니 좀 전에 오는 길에서 봤던 안개들이 걷혀 조금 아쉽기도 하다.


안개 때문에 호남평야의 지평선을 못 봐서 아쉬웠는데, 이제는 안개가 없어 아쉬운걸 보니, '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심경의 깊은 뜻들이 아주 조금 이해되는 듯하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 한참을 멀었지만 말이다.


안개 없는 겨울 햇살 가득한 호남평야의 지평선도 보고 싶고, 안개 가득한 전나무 숲길도 보고 싶은 욕심인 것이었다.


안개가 있던 없던 다 호남평야고 전나무 숲길이건만, 작은 욕심에 아쉬움이 생기니 아직도 한참을 멀었나 보다.

모든 것은 다 머무르지 않고 변하는 거였다.

또 그 속에서 끝까지 변하지 않고, 보여 주고 싶은 것들 굳건히 머무르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고 말이다


지금 이대로 안개가 없다 하여도 향기 가득한 숲길 너무 좋은데도 욕심을 내고 있으니 또 부끄러움이 앞선다.


아쉬움은 욕심이 원인이 맞는 것 같다.


안개 낀 멋진 전나무 숲도, 지금처럼 향기로운 맑은 전나무 숲도 아쉬울 것 없이 다 좋은데 말이다.


그래서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色卽是空 空卽是色...)'라고 하셨던 걸까?

여전히 어렵고 또 힘든 말씀들이라서 다 이해하지 못하여, 그냥 이 꿈같은 길을 한껏 누리며 걷기로 한다.


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안개 낀 전나무 숲길은 꿈에 보았던 그 길로 남겨 언젠가 또 올 수밖에 없는 기회로 남겨두면 된다.

천왕문에서 본 전나무 숲길

그 길 끝에 서있는 천왕문을 지나, 그 문에서 뒤돌아 본 숲길도 가슴에 담는다.

걷고 싶었던 그 길을 이제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있다.


내소사 봉래루(來蘇寺 逢萊樓)

천왕문을 지나니 큰 당산나무가 멋지게 서있다.

다시 한번 불교의 포용력과 배려, 또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누구도 무엇도 내치지 않고, 다치지 않게 품을 수 있는 따뜻함도 좋다.

내소사 석포리 당산나무


안으로 오르니, 단아함 가득한 전각(殿閣)들이 차분히 놓여있다.

단층이 칠해지지 않은 전각들은 이 계절 겨울 참 잘 어울린다.

맞배지붕 옆 박공(牔栱)의 기다란 조각조각들이 세로로 그 색들을 달리하고 있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사찰 건물을 세련되게 만들고 있어 좋다.


더불어 대웅전 꽃모양 문살무늬도 단색이지만 꽃과 잎의 채도를 달리해 화려함을 숨기지는 않고 있어 또 좋다.

색을 놓지 않아 더 세련되고 편안하다.


대웅전에 여래께 조용히 인사드리고 나오니, 사찰 안내 하시는 분께서 먼 곳에서 온 손님이라며 사찰 뒤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관음전(觀音殿)이 있다 하시며, 꼭 관음전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을 뵙고 가라고 하신다.


힘든 이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관세음보살은 가톨릭의 성모님처럼 따뜻하신 분이시라 늘 편안하고 포근한 머니 느낌이라 좋다.


가르쳐주신 길을 열심히 오르다 길을 잃어 더 먼 높은 산 위 암자인 청련암(靑蓮庵)까지 가는 수고를 하고 말았다.

청련암(靑蓮庵)

내려오며 보니, 길을 잃을 곳이 아닌데 관음전의 관세음보살께서 운동 좀 하라시며 일부러 그러신 게 틀림없다.

왜 못 보았을까 싶을 정도로 길 바로 옆에 작은 이정표도 있건만...

청련암까지 갔다 오느라 풀어진 종아리를 달래며 관음전에 한참을 앉았다.

관세음보살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전하니, 다 듣고 계신다.

그리고 말없이 들릴 듯 말 듯 미소만 지우신다.

들어주셨으니 고맙습니다 하고 나오니, 올 때 몰랐던 아래 풍경이 더 고마워진다.

산 위 관음전에서 바라 본 내소사

내소사가 한눈에 보인다.

크게 보라고 하신다.

너무 예민하게 보지 말고, 조금 더 크게 보라고 하신 것 같다.

중생을 살피고, 중생들을 고통과 고난에서 구제하시는 관세음보살을 경내에 두지 않고 왜 따로 산 위에 모셨는지 알 것만 같다.

  

꿈에 보았던 길을 걷고, 생각하지도 못한 산행도 하고, 산행 후 휴식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서 좋다.


걷고 싶은 그 길을 걸었지만 여전히 '꿈에 보았던 길, 그 길'로 남을 것 같다.

그래서 언젠가 좋은 이들과 작은 이야기들을 하며 또 올 것 같다.

또 그 좋은 이들에게도 휴식 같은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이 될게 틀림없다.


다시 내려가는 그 길에 그런 이들이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다.

다들 웃으면서 말이다.


돌아오는 길, 호남평야에는 안개가 다 흩어지고 지평선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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