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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Dec 04. 2023

원더랜드가 아니더라도 아몬드 크루아상은 판다

병 주고 약 주는 텍사스 시골살이 어떤가요

나는 미국 시골에 산다. 사람들은 이 시골을 애기랜드(Aggieland)라고 부른다. 애기(Aggie)는 텍사스 농공대학의 별명인데, 이름이 입에 잘 붙지 않고 멋 없다 보니 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편이 이곳에 직장을 구하며 나도 어쩌다 애기의 일원이 되에 살고 있다. 그리고 애기랜드에 산다는 건 아몬드 크루아상을 먹기 힘들다는 얘기다. 빵이 주식인 미국에서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사실이다. 적어도 텍사스 주 브라조스 카운티에 위치한 인구 12만 명의 작은 마을에 사는 나에게는 그렇다.


텍사스 농공대학 (Agricultural and Mechanical College of Texas)은 텍사스 A&M라는 이름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


사실 갈 만한 제과점을 찾는 건 한때는 애리조나의 주도였던 투손에 살 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56만 명이 넘게 사는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그 도시에서 입 소문난 빵집은 대체로 케이크 가게였고, 아이스크림도 튀겨 먹는 미국 사람들 취향에 따라선지 그곳의 맛있다던 케이크는 설탕을 녹여 만든 아이싱이 무척 두껍고 달았다. 미각을 충족하고 싶지, 당뇨를 유발하고 싶지 않아 그냥 구경만 하고 돌아 나와야 했다. 그래도 투손엔 프랜차이즈 수퍼마켓이 많아 운 좋으면 에어프라이어로 되살릴 수 있는 빵이나 적당한 달기와 크기의 조각 케이크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전에야 코스트코 하나 생긴 이곳의 사정은 다르다. 우리 동네 빵은 무척 크고 양이 많다. 너무 달거나 비싸다.


아몬드 크루아상은 만들기 쉬운 빵이 아니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되 결대로 찢어지는 완벽한 크루아상을 만들려면 상온에 적당히 녹은 버터와 손으로 치댄 반죽을 켜켜이 쌓아 적당한 두께로 밀고, 휴지와 발효를 거친 후 알맞게 구워낸 크루아상에다 럼주와 아몬드 가루를 넣고 만든 크림을 바르고 채워 다시 구워야 한다. 그만큼 정성과 기술이 집약된 까다로운 빵이다.


그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빵이 서울에선 흔하디흔해 외출 동선에 겹칠 때마다 나는 종종 빵집에 들르곤 했다. 부러 찾아갈 필요 없이 잠깐 들르기만 해도 진열대 위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아몬드 크루아상을 집게로 집어서 결제만 하면 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여기 미국 시골에는 프랜차이즈 빵집마저 없다. 돈이 있어도 못 사 먹는다. 그래도 꼭 먹어야 하겠다면? 간단하다.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휴스턴으로 가면 된다. 우리 동네에서 대중교통으로 2시간 45분, 자가용으로 1시간 30분 정도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면 갓 구운 아몬드 크루아상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곳엔 서울만큼이나 괜찮은 베이커리가 즐비하고,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손으로 직접 만든 울(wool) 공예품들. 제법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난다.

서울에 살 때는 몰랐다. 이 세상 모든 맛있는 빵은 도시에서 구워진다는 걸. 문화와 예술은 물론이거니와 빵의 종류와 제빵 기술마저 인프라가 밀집된 도시에 많고 훨씬 더 발달한다는 걸. 빵장수는 가급적 많은 빵을 팔고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곳에서 빵을 판다. 잘 팔릴 확신이 없는 곳에서는 빵을 굽지 않는다. 아니면 대충 굽거나 비싸게 내놓는다. 최근에 생긴 프랑스풍 레스토랑에서 5달러 내고 시킨 밋밋한 크루아상에 블루베리 잼과 버터를 치덕치덕 바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도 여기 크루아상이 12개에 5.99달러 하는 코스트코 크루아상보다는 괜찮다고. 대체 왜 이 동네는 중간이 없느냐고.


결국 밀대마저 들어야 하는 걸까. 잠깐 서울에 살며 프라이팬 한 번 든 적 없던 내가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만든 게 능이백숙이다. 이젠 소꼬리 곰탕도 끓일 줄 알고 김밥 열 줄도 말아낼 만큼 요리 스킬이 늘었지만 사실 원해서는 아니다. 도시의 까다롭고 실속 있는 입맛에 길들어진 내 기준에 이곳의 외식 기본값과 따라붙는 팁은 너무 과하다. 밥값에 20%나 하는 서비스 비용을 부담하면서 가고 싶은 데가 없고, 그만큼 값어치 하는 곳도 변변찮아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걷어붙여야 한다. 잘 익은 디저트 빵 한 덩이는 끼니마다 요리 노동하는 나에게 작은 보상과도 같다. 빵만큼은 생산이 아닌 소비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내게 페이스트리 전문 제과점 하나 없는 미국 시골은 정을 붙이기 어렵다. 텍사스로 돌아온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 서울이 그리워진다.


그렇게 빵 타령하던 내가 미처 간과하고 지나친 게 있으니 바로 시골엔 장날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미국 시골에도 주말장은 열린다. 매주 토요일, 차로 20분 걸리는 파머스 마켓에선 갓 수확한 싱싱한 꽃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농사꾼이 직거래하는 알차고 노란 수박을 맛볼 수 있다. 무엇보다 아몬드 크림으로 속을 꽉 채운 아몬드 크루아상을 살 수 있다.


파머스 마켓에서 산 꽃다발. 자주 물을 갈아주고 줄기를 잘라줬더니 그 향기와 봉우리가 일주일 넘게 갔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빵을 굽다가 은퇴하고 여기 애기랜드에 정착했다는 흰머리 성성한 제빵사는 여전히 정정하다. 그의 SNS 계정엔 깃털처럼 가벼운 크루아상을 만든다고 적혀 있다. 그는 깨끗하고 단추가 줄줄이 달린 조리복을 갖춰입고 직접 만든 빵을 판다. 제철을 맞은 피칸 파이와 블루베리 가득한 스콘은 딱 봐도 장인의 솜씨가 느껴진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몬드 크루아상을 집어 든다. 문제도, 답도 결국 이 시골에 있다는 사실에 기쁘고도 헛헛하지만, 그보다 안도한다. 빵 몇 덩이 사겠다고 탄소 발자국을 연달아 찍으며 도시로 원정 갈 일이 줄었으니 말이다.


한 손엔 꽃다발을, 다른 한 손엔 아몬드 크루아상 하나를 들고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다행히 애기랜드 산 아몬드 크루아상은 맛있다. 겉이 바삭하고 안은 촉촉한 크루아상을 먹는 내 마음이 잠시나마 깃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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