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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Jan 01. 2024

그릇을 비울수록 그늘은 줄어든다

무딘 칼로 반듯하게, 값비싼 반지 없이도 번듯하게


난 그곳이 무척 커다란 경기장인 줄 알았다. 남편과 휴스턴에서 장을 보고 69번 사우스웨스트 프리웨이를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70마일 속력으로 운전하는 와중에도 내가 앉은 조수석 쪽에서 보이는 으리으리한 건물은 절제된 화려함을 끝도 없이 자랑했다. 그곳은 역시나 경기장이었다. 한때 다목적 스포츠 경기장이었고, 퀸과 마이클 잭슨이 노래하고 춤을 추던 공연장이기도 했다. 현재는 레이크우드라는 이름으로 매주 신도 4만 5,000여 명이 찾아오는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 교회 중 하나다.



하나님은 우리가 재정적으로 번영하고, 돈을 많이 갖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운명을 성취하기를 원하십니다. - 조엘 오스틴 



그 교회보다 유명한 사람은 ‘긍정의 힘’이라는 자기개발서를 쓴 사람으로도 알려진 설립자 조엘 오스틴이다. 물질적 이득에 대한 보상이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설파하는 그는 어쩌면 자본주의의 끝판왕이자,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올리고 취임 선서하는 이 나라를 대표하는 종교인이다. 가난하지 않고 부유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니. 독실한 신도들은 너도나도 신의 은총을 받고자 (부자가 되고자) 교회로 몰려든다. 밀린 세금을 내게 해달라며, 제발 나도 로또가 되게 해 달라며 열과 성을 다해 기도한다.



127년 된 집안 가보인 카톨릭 성경에 손을 올리고 취임 선서를 하는 바이든 대통령. 사진= Alex Wong/Getty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다. 누구나 물질적 풍요를 찬양하고, 가진 걸 자랑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물론 쟁여놓는데도 마찬가지다. 우리 부부가 사는 월세 1,570달러짜리 아파트엔 한 달에 50불을 내면 이용할 수 있는 유료 창고가 있다. 요즘 항상 셔터가 올라가 있는 창고가 있길래 슬쩍 들여다보니 SUV 한 대가 들어갈 만한 창고 안이 냉동고나 소파, 자전거 등등 중고 시장에 내다 팔면 월세 한두 번은 족히 낼 만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답게 각종 테러와 전쟁의 가능성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미국의 오래된 집들은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방공호 역할을 하거나 식량을 보관할 수 있는 지하가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어쩌다 내 눈에 띈 창고를 꽉 채운, 쓸만하지만 쓰지 않는 잡동사니들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전쟁이나 테러 사태 때엔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좀 과하게 느껴졌다.



더 사기보단 덜 채울 생각. 새것을 사기보단 좀 헌 것을 사서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생각. 그 생각은 때때로 실천되지 않고, 이 나라의 만연한 소비 풍토에 종종 나도 휩쓸리곤 한다. 그래도 잊지 않는 건 내 물질적 소비가 이 땅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재활용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보다 그냥 묻어버리는 게 비용이 덜해 알루미늄 캔이든 음식물 쓰레기든 모조리 매립해 버리는 이 텍사스에도 언젠가 땅이 모자란 날이 올 거라는 사실이다.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에 잘 드는 식칼을 샀다가 취소한 게 그 이유다. 세계 최대 소비 강국에 살지만, 하나님도 부자를 사랑한다는 자본주의 제국에서 꼬박꼬박 월급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내 식이라는 게 있다.



버려진 문고리와 자투리 목재들로 새로운 쓰임새를 얻게 된 각종 걸이들. 사진=박인정



새로운 반지도 필요 없다. 빚을 청산하고 통장에 잔액이 쌓이며 드디어 번듯한 결혼반지 하나 맞출 기회가 찾아왔으나, 당장 내가 끼고 있는 15달러짜리 반지보다 대단한 세공 기술과 재료가 들어간 몇천 달러짜리 반지가 그만큼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고급스러운 결혼반지가 누구에겐 행복한 결혼을 상징하는 수단이겠지만, 결혼반지 없이도 불행하지 않았던 내겐 별 의미가 없다. 손가락에 꿰는 터무니 없이 비싼 고리에 가깝다. 



결혼 10주년이 되면 모르겠다. 당장의 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라고 종용하는 남편보다 분리수거 잘하는 남편이 좋다. 현관문 밖에 내다 놓기만 하면 대신 쓰레기를 버려주는 (모조리 매립해 주는),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전부 이용하는 발렛 서비스를 마다하는 건 솔직히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그래도 나는 남편과 함께 물병 라벨을 뜯고 종이 상자를 접는다. 그렇게 모은 재활용품을 트렁크에 싣고 운전대를 잡는 남편을 독려한다. 이 동네 유일한 재활용 센터가 남편의 일터 주차장에 있는 건 뜻밖의 행운이다. 분리수거하겠다고 유류비가 더 들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제 저녁이다. 찬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이제 칼을 갈아야겠다. 15달러짜리 반지는 잠깐 빼둔다. 물에다 된장을 풀고, 잘 갈아낸 칼로 반듯하게 두부를 자르는데 오늘의 일과 분리배출을 끝낸 남편이 빈손이 되어 들어온다. 내 속이 다 후련하다. 번듯한 결혼반지 없어도 우린 번듯하다. 이게 우리 부부가 부자가 되는 방식이다.



영월매일(http://www.yeongwol-mail.co.kr)에서 연재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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