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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May 03. 2024

함부로 넘는 선(線)은 선(善)이 될 수 없다

분명한 게 당연한 것은 아니라고요.


 "교수님, 이 노래 가사를 전부 이해할 수 있어요?"


무척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던 질문이란다. 때는 이번 학기 초, 수업 시작 전 학생들의 주목을 환기하기 위해 뉴욕 타임스에 소개된 팝송을 틀곤 하던 남편이 어쩌다 가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을 선곡한 날이었다.


뮤직비디오 속 윤하가 열창을 끝내고 블랙홀의 경계인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빨려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어느 남학생이 던진 물음에 남편은 잠시 벙쪘다. 거긴 미국 텍사스였다. 1세대 이민자로 영어 발음도, 어휘도 지극히 한국인다운 남편이 미처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가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한 남편은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노래 해석에 들어갔다. 본 수업에 앞서 우주과학과 시간 개념에 대한 강의를 먼저 하게 되었다며 남편은 휴대전화 너머로 웃어 보였다. 반면에 조심스럽기는커녕, 무심코 툭 던진 돌멩이에 얻어맞은 개구리 같은 심정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있던 나는 그만 질투가 났다.  


 "허허허, 전 필리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건 댈러스발 이코노미석에 14시간 내내 갇혀있던 내가 한국 땅을 밟은 지 채 1시간도 안 되어 들은 말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이었다. 23킬로그램짜리 캐리어 두 개를 싣고 부랴부랴 택시에 오르는데 별말 없이 캐리어 나르는 걸 도와주고 운전석에 앉은 기사 아저씨가 반갑고도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아, 예. 나는 마지못해 웃었다. 알고 보니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 미국 맨해튼에서 거주 중이었다는 택시 기사 아저씨의 놀라운 무용담이 펼쳐졌다. 빨리 숙소에 도착해서 캐리어나 펼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억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횡단보도 앞에서, 백화점 선물 코너에서, 병원 접수대에서 내게 비슷한 일은 왕왕 일어난다. 코로나 시국, 보란 듯이 대한민국 여권을 보여줘도 외국인으로 분류 당한 일도 있고, 내가 거주하는 곳이 관광객의 왕래가 빈번한 홍대 인근이다 보니 어느 정도 그런 오해를 이해하고 이골도 났지만 불쾌함마저 무뎌지는 건 아니다. 몇 년간 유지했던 밝은 갈색 머리를 짙게 염색하고 찾아간 서울 국제 불교박람회에서 -어쩐지 내 질문을 못 들은 척하더라- 액세서리를 팔던 내 또래 여성에게 외국인 취급을 받은 건 치명타였다. 감미로운 싱잉볼 연주를 들으면서도 마음이 비워지기는커녕 울화가 쌓이고 말았다.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던 싱잉볼. 크기가 클수록 낮은 소리가 난다. (사진=박인정)


미국에 사는 7년 동안 나는 한 번도 미국인에게 내 외모를 지적당하거나 언급받은 적이 없다. 구두가 근사하다거나 반지가 예쁘다는 말을 종종 들었으나 그건 음식을 서빙하는 웨이터가 건네는 의례적 인사 같은 성격을 띄었고, 그마저 직접적인 외모 묘사는 아니었다. 다인종 다문화인 미국에서 상대방의 외양에 대한 발언은 자칫 차별적 의사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로 된 가사를 이해하느냐고 딱 봐도 다른 나라에서 온 남편에게 미국인 남학생이 지나치리만큼 정중하게 물어본 이유도 남편이 타지 출신이라는 게 아무리 분명한 사실이라도, 그런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구하는 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응당한 사실을 나도 전에는 몰랐다. 너는 앞머리를 내려야 한다, 그 바지는 황금비율을 해치는 코디니 아서라 미대 나온 티를 족족 내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 넘은 충고를 하곤 했다. 친구의 남편이자 영국인 R를 이태원 클럽에서 처음 만났을 땐 면전에다 너무 잘생겼다며 호들갑을 떨어 난처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내가 어리거나 취해 있을 때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낯 뜨거운 일이다. 한국과 다르게 타인의 외양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자제하는 문화에 감화되지 않았더라면 평생 그렇게 남의 외양에 잣대를 들이대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럴 수 있다. 아무리 내 머리가 검고 한국말이 유창해도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으로 나를 오인할 수 있다. 내가 비판하는 건 외양만으로 쉽게 타인을 단정하고, 그걸 스스럼없이 내뱉는 사람들의 태도다. 자신의 선입견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듣는 사람의 귀에 박히게 하는 화술은 아무리 악의가 없어도, 설령 칭찬의 의미를 띠고 있어도 차별이고 폭력일 수 있다. '어라, 다른 나라 사람인 줄 몰랐는데 우리나라 사람이군요!' 은근한 무시나 철벽으로 상대방을 곤란케 하다 멋쩍은 표정으로 뒤늦은 인사를 건네는, 어쩌면 그들 식의 사과가 나는 결코 사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멋대로 그들이 그어놓은 선 위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지치고 짜증이 날 뿐이다.


축구하는 아이들이 잔디를 뛰노는 텍사스 웨이코(Waco)의 전경. (사진=박인정)


예약하고 들른 피부과에서도 어김없는 대접을 받고 터덜터덜 홍대 9번 출구 앞 화장품 가게에 들러 계산대를 향하는데 역시나 직원이 봉투가 필요하냐며 영어로 묻는다. 아뇨. 나는 한국어로 대답하며 신용카드를 건넨다. 아, 죄송합니다. 정중한 말투에 놀란 나는 직원을 올려다본다. 아니나 다를까. 이 훤칠한 남자 직원도 단일민족의 외모가 아니다. 같은 처지인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고, 어쩌면 저분도 내 맘과 같을까. 결제하고 밖으로 나오는 나는 왠지 위로받은 듯한 느낌이 든다. 수많은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섞여 들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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