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가 남기고 간 레몬 나무를 보살피며.
거대한 산불이 미국 LA의 수많은 집을 덮치던 지난겨울, 우리 부부는 현재 살고 있는 텍사스에서 첫 집을 샀다. 차 두 대가 들어갈 수 있는 차고와 욕실이 딸린 3개의 방, 그리고 벽난로가 있는 거실까지. 1시간 내내 책 한 권과 맞먹는 두꺼운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난 이곳이 나와 남편의 보금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잘 실감 나지 않았다.
이사센터 직원들이 삐뚤게 설치하고 간 침대를 반듯이 맞추고, 이삿짐을 푸느라 쓰러지듯 잠들기를 며칠 반복하자 서서히 이 집이 내 집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캘리포니아를 강타한 화마는 더욱 커지고,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사람들의 검댕이 묻은 얼굴들은 늘어만 갔다.
반면 크리스마스에도 반팔을 입고 다닐 정도로 따뜻한 우리 동네의 겨울은 갑작스레 하강한 북극 한파로 영하 6도를 기록했다. 급기야 눈까지 예고되자, 난 전 집주인이 놓고 간 레몬 나무가 얼어 죽을까 봐 현관문 앞에 놓여있던 큼지막한 화분을 차고 안으로 들여야 했다.
5년 전, 미국 애리조나에 살았을 때 난 처음으로 산불을 목도했다. 백두산보다 높은 레몬 산(Mount Lemmon)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넘나드는 불줄기를 올려다보며 하루를 시작해야만 했다. 애리조나의 새파란 하늘은 매캐한 연기로 한 달 넘게 뿌연 연기에 휩싸였다. 남편은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미국 서부엔 종종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 종종 있는 일은 캐나다에서도 벌어졌다. 작년 여름, 남편의 컨퍼런스 동선에 맞춰 휴가를 보내기로 한 캐나다의 밴프(Banff)는 에메랄드빛 빙하수와 천혜의 자연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남편은 이전에 가 본 적 있던 설퍼 산(Mount Sulphur)에 함께 오르자고 했고, 우린 한 사람당 60달러가 넘는 값비싼 곤돌라를 타는 대신 직접 산을 오르기로 했다.
헉헉대는 숨을 붙들고 가까스로 정상에 올랐으나 산 아래 전망은 탁 트이기는커녕 안개에 쌓인 듯 부옇기만 했다. 그제야 우리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북부와 알버타 중부에서 시작된 산불의 연기가 밴프까지 덮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여행하는 3일 내내 캐나다를 휩쓴 크고 작은 산불은 200개 넘게 늘어났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마른 장작 타는 냄새가 났고, 잿빛 하늘 아래 청량한 빙하수마저 흐리멍덩한 색으로 변했다.
산불로 인한 미세먼지 농도가 황사 철 서울보다 심해져 목과 눈까지 따끔해 오자 결국 우리 부부는 국립공원 투어를 포기하고 영화관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택한 영화는 쌍둥이 토네이도가 무자비하게 마을을 휩쓰는 재난 영화였다. 다행히도 영화는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 속 재난을 감상하며 현실의 재난이 낫다고 위안할 수 있었다.
모든 게 거대한 이곳에선 산불은 흔하다. 국가기관간소방센터(NIFC)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미국에선 연평균 약 63,000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비슷한 기간 동안 567건의 산불이 보고된 한국의 100배가 넘는 수치다.
그리고 누구나 알다시피 잦은 산불은 지구 온난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북극에 머물러야 할 한기를 여기 텍사스 남부까지 밀어냈던 뜨거운 공기는 이제 이곳의 겨울을 여름처럼 만든다. 몇 주 전만 해도 눈이 내렸던 우리 동네는 며칠 전 29도를 기록했다. 1957년에 기록된 최고 온도 28도를 갈아치운 신기록이다. 아무리 텍사스라도 2월 초에 한여름 날씨는 우려스러운 일이다.
우려스러운 건 단지 늘어가는 산불이나 급변하는 기후뿐만이 아니다. 헌법까지 개정해 이민자를 솎아내겠다는 공공연한 엄포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은 이 나라에서 이민자로 살아야 하는 내 처지 또한 그렇다. 나는 요즘 뉴스를 보는 게 겁이 난다. 점차 극한으로 치닫는 날씨와 바람 잘 날 없는 세상 소란에 생애 처음 집을 샀다는 기쁨보단 컴컴한 차고 안에서 햇빛을 보지 못해 잔뜩 시들어버린 화분 옆 죽은 꿀벌에게 자꾸 눈이 간다.
오늘도 우리 동네는 29도를 기록했다. 볕에 내놓자 좀 기운 차리나 싶던 레몬 나무의 성한 잎들이 따가운 햇살을 피해 조개처럼 오므라든다. 그래도 벌들은 돌아온다. 노랗게 죽은 잎을 툭툭 떨구어내고 피워낸 레몬꽃 향기에 이끌린 꿀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앙상해진 가지 사이사이를 부산스럽게 채운다. 작지만 열심인 벌들의 군무에 집중하다 보니 내 세상도 딱 그 화분만 해진다. 그게 잠시나마 위로가 된다.
*영월매일에서 동시 연재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