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웅보 Dec 08. 2022

3. 막걸리 한잔

비자발적 전업주부와 시크한 바깥양반

비자발적 전업주부와 시크한 바깥양반

3. 막걸리 한잔



연애와 스킨십의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가 젊은 세대 사이 이슈라던데. 유행을 특별히 신경 쓰거나 따라가려고 노력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이 이슈만큼은 우리가 유행을 선도해버렸다. 앞서도 한참 앞서버렸다.          

여전히 그냥 그런 친구 사이였던 바깥양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내 자취방에 혼자 놀러 왔다. 생각할만한 특별한 의도가 있었느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 무렵 무려 바깥양반의 가장 친한 친구와 썸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깥양반은 일종의 중재(?)를 하러 오신 것이었다.     



나는 술이 센 편은 아니다. 즐기면서 먹기는 하지만, 주량은 평범. 주종도 무척 가려서 소주는 30대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막걸리에 취약했다. 취하기도 금방 취하고 뒤탈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그날 주종이 막걸리였다. 그것도 야무지게 사이다까지 섞어서 아주 술술 들어갔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났다.          


정신이 들었을 땐, 모든 상황이 종결된 뒤였다. 바깥양반은 떠나고 없었고, 나에게는 친구에 대한 죄책감,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두려움, 뒷일에 대한 걱정, 사태 전반에 대한 후회, 그리고 지독한 숙취만이 남아있었다.     


머리를 싸맸다. 으으으,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앞으로 학교를 어떻게 다니지.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하나. 사과를 해야 하는데 연락은 받아줄까. 하지만 그런 걱정도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하루 이틀 정도 지나고 무려 바깥양반과 그녀의 친구(나와 썸을 타던)가 함께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얼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두려움과 압박감에 떨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두 사람은 왜 함께 나를 찾아왔는가. 나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것인가.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차 재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날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우리가 무얼 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나는 바보 같았고 두 여성은 관대했다. 그렇게 모종의 교통정리가 이루어졌다. 바깥양반 친구와의 관계는 청산되고 본격적으로 바깥양반과 썸을 타게 되었다.          



재밌는 것은 당시 그 친구와 우리는 여전히 가장 친한 친구다. 과거의 썸 관계는 나와 그 친구의 가장 취약한 약점처럼 작용하고 있다. 서로 신나게 놀리고 깎아내리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일종의 침묵 버튼?     


그 뒤로 썸이 연애가 되기까지도 이런저런 사건과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그건 일단 나중의 이야기. 이제 와 돌아보자면 시작은 어찌 되었건 이 일은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을 가져다준, 살면서 가장 잘 친 사고였다. 칭찬해, 과거의 나.          



※ 바깥양반의 한 마디     

- 난 그날 이후로 막걸리를 마시지 않아.
작가의 이전글 비자발적 전업주부와 시크한 바깥양반 / 2. 민증 까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