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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론즈실버 Jun 12. 2023

#26. 비장하게 사직서를 물렀다.

최종 결재까지 완료된 사직서가 영구 삭제됐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면. (솔직히 퇴근을 하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도무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건 지 모르겠다.) '원래대로' 라면 나는 6월 9일 저번주 금요일 근무를 마지막으로 지금 다니는(!) 회사와는 작별을 고했어야 했다. '했어야 했다'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40명 밖에 안 되는 작은 기업임에도 고작 나 하나 나가는데, 인사 담당자, 팀장님, 이사님, 대표님까지 무려 4단계의 결재선을 탔다. 하지만 오래 걸릴 거란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매끄럽게~, 하루 만에 모든 결재가 끝났었다. 그래서 나는, 6월 9일 금요일이 지나면, 애인과 강아지, 고양이 한 마리와 행복한, 6월의 평일을 누릴 줄 알았건, 만. 


4개의 결재선이 하루 만에 종결 날 때의 그 시원 섭섭함이란.




퇴사 사유는 영업이라는 '직무가 맞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사직서에도 솔직하게 '직무변경으로 인한~'이라고 썼다.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조직의 이사가 면담을 요청하면서, '팀을 옮겨주겠다.' 했다. 이게 퇴사를 고작 2일 앞둔 날이었다.


그렇담 나는 왜 처음부터 포지션 변경을 요청하지 않았냐면, 애초에 퇴사하던 팀에 부서장이 만약 '팀을 옮길 거라면, 가급적이면 같은 조직 내에서 옮기길' 권유했다. 그래서 감히 내가 선택지에 넣을 수 있는 팀은 운영, 마케팅이었다. 운영은 내가 이미 경험해 본 적 있어서 궁금하지 않았고, 반면 마케팅은 너무 해보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나가겠다.' 했다. 


그랬더니 며칠 후 다른 조직의 부서장이 '그런 일이 있었냐?'면서 컨택을 해왔다. 문득 다른 업무를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살짝씩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고, 거기에 대표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게 만들었다. 대표는 내가 가진 전문적인 의료적 지식을 이용해서 그려볼 수 있는, 새로운 그림들을 보여줬다. 거기에 홀리다시피 매료됐고, 나는 결국 퇴사를 물렀다. 


전체 채널에 올라오는 조직변경 슬랙의 당사자가 나일 땐, 많이 남사스럽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내가 가게 된 부서는 연구소다. 나름의 기술로 국책사업을 따오고 제안서와 사업 계획서를 쓰는 부서. 원래 4명이던 이 부서의 인력은 반이 퇴사를 했고 그 이후, 인력이 구해지지 않아 꽤나 많은 업무가 쌓여있다고 한다. 


오늘 출근길은 마치 새로운 회사로 입사하는데, 다 아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인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아는 게 없는 부서였기 때문에 신입으로 문서 아카이브를 뒤적거렸고, 기존 제안서나 계획서를 읽었다.

 



사실 이 업무가 어떨지 모르겠다. 그래서 겁이 나지만. 

최근에 어느 브런치 작가님이 추천해 주신, [소울서퍼]의 여주인공처럼 이번 파도에도 기꺼이 나를 맡겨볼까 한다. 서퍼들은 파도가 오면 거기에 마냥 '맞춰서' 타는 것보다, 자신에게 맞는 파도를 기다린다. 그러다 비로소 나와 '딱 맞는' 그런 파도에 올라타게 되면, 더 자유롭게, 얽매이는 것 없이 기술을 펼친다. 


서퍼가 자신에게 맞는 파도를 찾는 방법도 물 먹고, 물속에 내팽개 쳐지면서도, 이 파도, 저 파도 타보는 수밖에 없더라. 그래서 새로운 파도에 올라탔다. 우선 타봐야 '기다, 아니다'를 판단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 파도가 아니면 어떠랴, 싶다. 가다가 고꾸라지고, 물에 내동댕이 쳐지면 어떠랴, 하물며 여주인공처럼 팔하나를 잃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잃는데도, 마지막에 그보다 더 값진 걸 얻는 기회라면. 


더불어, 이번 팀이 이 회사에서 4번째 팀이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너 회사에서 정말 예쁨 받나보다.'라고 말해준다. 진심으로 감사하다. 이렇게 많은 기회를 주다니. 언제나 그랬듯 잘 해내고 싶어서 노력할 테고, 그 노력으로 언젠간 조금 더 자유롭게 파도를 탈 수 있기를 바라며. 

(아 출근 하기 싫다. 원래였으면 애인과 노닥거리고 운동하고 밥해먹고 산책하고 책읽고 그랬을 텐데 아쉽다 아쉬워)


제일 좋아하는 역삼 우체국 가는 길도, 조금 더 걸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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