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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Feb 02. 2023

나와 너가 만날 수 있는 곳, 그 어디에서.

나는, 최민석

 자신의 방이 편하지 않은 사람은 어느 공간이 편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내 방이 제일 편했다. 방 안의 모든 것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침대, 텔레비전, 컴퓨터, 닌텐도, 책, 인센스 스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언제 내 손에 닿아도 행복할 것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방에 있는 순간, 내가 굉장히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눈을 감고 있노라면 내가 너무 작아져서 세상에서 없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내 좁은 방의 형광등을 켠다. 여전히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안심하고 다시 눕는다. 다시 작아진다. 작아지다 못해 숨이 막혀온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본 천장은 어느 집 천장보다 낯설고 컸다. 새벽 2시, 결국 나는 따뜻하게 껴 입고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롱패딩을 입고, 털 크록스를 신고 뒤뚱뒤뚱 걸어가 도착한 곳은 우리집 근처 삼거리 골목이었다.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 부른다. 차는 다닐 수 없고, 리어카만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골목은, 회색 벽돌담과 붉은 벽돌담, 콘크리트 담이 있어 생겨난 것으로, 누구도 여기에 삼거리를 만들고자 계획하고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란할 때면 이곳에 와서 혼자 음악을 듣고 멍을 때린다. 사실 멍을 때리는 것도 아니다. 계속 생각을 한다. 문제가 뭘까. 대부분의 심란한 일에 대한 생각들이 이곳에서 해결되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 정리, 친할아버지의 죽음, 학회 창설, 대인 관계 등, 오면 일단 생각이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간다는 느낌이 들어 좋다. 나를 위한 것은 아니지만, 마치 앉으라고 만들어진 것 같은 벽돌 무더기에 앉아 음악을 튼다.


“Jazzyfact – journey”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가 있다. 나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당산 철교 위에 있던 내가 생각난다. 고3 때, 목동에 있는 학원을 가는 길에 처음 들은 노래였다. 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고, 한강은 그 노을 빛을 담아 금색으로 흐르고 있었다. 학원을 가던 안경잡이 고3은 그 순간 만큼에는 마치 제목 그대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어디로 갈까,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공상을 펼치던 나는 영등포구청 역에 내려 사람들 속에 떠밀려 학원에 도착하였다. 그 순간 왜 인지 모를 쓴 웃음이 났다. 150명이 넘는 강의생이 듣는 수업에서,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모르는 나의 선생님은 누가 듣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수업을 이어 나갔다. 그 때, 그 학원을 뛰쳐나왔으면 어땠을까. 솔직히 공부가 하기 싫었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말이다. 고3 때 나는 공부보다 더 즐거운 일들이 많았다. 지금까지도 만나는 친구들은 모두 고3 때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고 놀며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건 우리 모두가 똑같았다. 근데도 학원을 계속 다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물어보고 싶다. 그 정도로 친구들과의 관계는 적극적인 것이 아니었나.


잡념만 많아진다. 이럴 때는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하는 데 에너지를 쓰니까, 걸어서 에너지를 태워야 한다. 집 앞에 한강이 있어 너무 좋다. 새벽 한강은 춥다고 다들 등한시 하지만, 나는 되려 새벽 한강이 좋다. 아무도 없고, 어두컴컴한 그 한강에 비춘 꺼진 건물의 실루엣이 저녁시간보다 명확해서 좋다. 빛으로 자신을 크게 부풀리는 건물들이 안쓰럽게까지 보였지만, 새벽에는 그렇지 않다. 모두가 자신의 본모습만을 한강에 비춘다. 노래를 바꾼다.


“뜨거운 여름 밤은 가고 남은 건 없지만 – 잔나비”


이 노래를 알려준 사람은 고등학교 방송부 후배였다. 자기는 최정훈하고 결혼할거라며, 공연도 따라다니고, 노래를 나에게 마구 추천해준 사람이었다. 둘이 정말 친했었다. 너무 친해서 당시 여자친구였던 이 친구의 친구가 싫어했을 정도였다. 선을 지키다 못해 장벽을 세우고 대했지만 결국 사람들에게 비추기엔 그건 아니었나 보다. 이 친구는 잘 지내고 있을까? 재수를 결심하고 나서부터 연락이 끊겼다. 그 애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가 어디서 뭘 하고 있던지, 나는 항상 너가 행복하길 바라. 참으로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었지만, 우리 둘 다 고등학교 때 너무 힘들었잖아. 그게 전부 사람 떄문이라는게 아직도 슬프고, 지금은 더이상 너가 사람 때문에 힘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중, 고등학교 때, 나는 뭐든지 잘하고 싶었다. 공부도, 예체능도, 인간 관계도, 노는 것도, 연애도 모두 잘 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왔으니까 말이다.

성남에 살 시절, 그니까 내가 7살부터 10살 때, 아버지께선 성남 아트센터에서 근무하셨다.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정말 많은 문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근데 부모님은 단순히 체험하는 것을 넘어서 문화 생활을 하는 주체로 커가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이것저것 아트센터에서 많이 배웠다. 피아노, 바이올린, 해금을 배웠다. 사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은 어릴 때 누구나 한번 즈음 배워본다지만, 해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더 배우려고 했다. 어린 마음에는 특이한 거 하는 사람이 제일 멋있는 법이니까. 근데 잘했다. 그게 부모님 마음에는 퍽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내가 잘하고, 부모님께서 계속 칭찬해주시니까 좋아서 계속 했다. 해금 선생님은 8살 나에게 몇가지 음을 쳐주시더니 음을 맞춰보라고 하셨다. 들리니까 그냥 말했고, 그날부터 해금이 내 전공이 되었다. 알고 보니 절대음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금 선생님은 우리 엄마에게 엄청난 바람을 넣었고, 그 덕에 나는 8살부터 13살 때까지 하루에 무조건 해금을 3시간 정도 씩 했었다. 그러다가 내가 연주하는 곡의 작곡가가 심사를 하는 영재원에 합격도 하고, 중학생 정도만 있던 영재원에 유일한 초등학생으로 있기도 했다. 근데 영재원에 가니까 박탈감이 몰려오는 것이다. 해금 연주를 나보다 잘해서가 아니다. 배경의 차이였다. 그들의 부모는 못해도 국악 업계 종사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미 우리 아버지는 아트센터에서 퇴사하여 다른 일을 하고 계셨고, 어머니는 애초에 전혀 연관이 없던 업종에서 종사하였다. 다들 이미 국악중학교 진학이 확정되어 있던 상황에서, 나는 열심히 입시를 준비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중학교 입학이 힘들겠다는 것을. 예상한대로 떨어졌고, 나랑 같이 영재원에 다니던 그들은 해금이 가능성이 적어 시작한 가야금으로 내가 지망하던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 음악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학한 중학교에서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면서도, 공부는 잘했다. 사실 별로 하지 않았는데, 그냥 성적이 나왔다. 친구들도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이때부터 연애를 계속 했던 것 같다. 처음엔 남들 다하니까,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정신 차리니까 성산대교를 넘어서 왔다. 조금만 더 걸으면 생각이 멈추지 않을까? 성산대교를 좀 더 걸어가면 난지 거울분수가 나온다. 거기 좀 앉아있자. 다리가 아프다. 다시 노래를 바꾼다.


“좋다 – Day Break”


이 노래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들었던 노래이다. 늦은 밤, 자지 않고 버티던 나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데이 브레이크가 이 곡을 부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가사가 너무 좋았다. 마치 내 상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꽤 오래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었다. 잘 되어가던 중에 온 한강 데이트, 우리는 거울 분수로 향하였다. 무더운 여름 날, 돈 없는 중학생들에게 한강은 최고의 선택지였고, 시원하게 물도 틀어준다는데 안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거울 분수에서 재미나게 놀고, 이어폰을 끼고 이 노래를 틀어줬다.


‘어때?’

‘좋은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지금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말이다. 이 노래로 고백을 했고, 1년 반을 사귀었다. 즐거웠고, 행복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친구는 많았고, 공부는 꾸준히 전교권이었다. 많이 아파 학교를 별로 나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혼자 자습서를 풀며 공부했다. 나는 모든 걸 잘 하고 있었다. 중3 쯤, 선생님께서는 외고를 준비해보자고 하셨다. 성적도 좋고, 가는 것이 나에게 더 도움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외고 준비를 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때 만나던 여자친구와 멀어지고 있었다. 그 친구는 공부와는 영 담을 쌓고 살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랬나, 그 사이에 다른 남자애를 만나는 것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바람’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기에 나는 너무 잘 되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 받고, 그 남자애랑 같이 학교에서 손잡고 다니는 그 여자애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사람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고. 길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이때부터 무언가 잘못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라 생각해 더 ‘뭐든 잘하는 사람’에 목을 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고를 떨어졌다. 점점 망가져 가는 것 같았다.


의자가 너무 차가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다시 성산대교 쪽으로 걸어 가야겠다. 시계를 보니 3시 반이다. 발목이 너무 아파온다. 수술을 여러 번 한 발이기에 어쩔 수 없다. 발목을 한바퀴 빙 돌리고, 노래를 한 번 바꾼다.


“Jasmine – DPR Live”


한강에 오면 꼭 한 번은 듣는다. 새벽의 한강이랑 너무 잘 어울리는 노래이다. 새벽에도, 동이 트기 전 즈음에도 매우 잘 어울린다.


도시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한 이른 아침의 한강

그 물에 비친 또 하나의 도시

천천히 흘러가는 물 속에 무수히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그 도시를

나는 그 도시를 가고싶어라


대학교 1학년 6월에 쓴 시이다. 사실 그 때 나에게 한강은 모든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칙칙한 20살을 거쳐온 나에게 한강은 대학교 근처의 술집 거리와는 다른 유흥이었다. 적절한 자연과 우뚝 솟은 빌딩은 안 어울리는 것처럼 보여도 매우 잘 어울리고, 급하게 성장한 저 빌딩과 꾸준한 시간을 거쳐 자라난 자연은 어느 쪽이든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강을 주제로 글도 꾸준히 썼더랬다.


……이러한 생각으로 나선 한강은 항상 태양이 아직 모습을 내비치기 전 어둑한 모습을 지키고 있다. 나는 이러한 것 때문에 새벽 한강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태양의 빛은 어느 누구나 인정하듯 세계 모든 곳을 공평하게 비춰준다. 나는 가끔 이런 점에 염증을 느끼곤 한다. 이 빛이 모든 곳에 비추면 분명 좋은 일이겠지만, 나의 진짜 모습을 태양이 떠있는 그 시간대에는 드러낼 수 없다는 것에서 말이다. 그렇게 나선 한강 길은 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샘이라도 하듯 잔디에 낀 하얀 서리들로 따뜻함을 거부하는 듯 보인다. 나의 모습이다. 어두운 곳에서 나는 한강의 진심이 이 서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길을 계속해서 걸어간다.

 나의 공간이다. 어두움 속에서 나의 피로감을 되짚어보며, 어디서부터 였는지 생각을 해본다. 언제나 그렇듯 답을 모르는 문제이다. 그렇게 또 우울이 밀려온다. 우울은 전신으로 퍼져 나를 이 한강 어딘가 멀리로 보낸다. 계속해서 말이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절두산 순교성지를 언제나처럼 본다. 

어떤 사람들의 머리가 떨어진 이 바닥을 사람들은 아스팔트를 깔고, 평평하게 만들어 밟고, 또 밟고 다닌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바닥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 시대에 순교한 그 사람들은, 어떠한 마음을 지고, 순교를 하였는가. 종교적 사명감? 사명감. 참 오랜 시간 나에게 부재했던 마음이다. 나뿐만 아니라 나의 나이또래 사람들은 현재는 갖기 힘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있었다면 나는, 떠진 눈을 다시 감고 쭉 잘 수 있었을까. 이 우울에 걸음을 이끌려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 또 한참이나 서서 생각을 해본다.

(중략)

가는 길에 운동 기구에서 같이 운동을 하는 노부부를 본다. 얼굴의 그분들의 경험이 주름으로 촘촘히 박혀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찬란하다. 아름다운 얼굴로 서로의 운동을 도와주는 그들의 모습, 그 관계는 한없이 빛난다. 어두운, 나만의 공간에서 창 밖으로 보이는 빛과 같다. 그들의 관계를 보며, 나도 저러한 관계를 주변 사람들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잘 모르겠다. 중,고등학교, 재수 시절에서의 나의 인간관계는 정말 최악이었다. 얽히고 얽힌 문제들과 그로 인해 계속해서 끊겨가는 인간관계. 분명 나의 잘못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지금보다 더욱 옹졸하고 어리석어, 이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는 인간관계에 있다는 생각을 하며, 끊어진 관계의 복구 대신, 더더욱 축소를 해나갔다. 재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고, 재수가 끝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는 인간 관계의 근본적 문제가 아닌 비로소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에게서 여러 성향을 보고, 그들이 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굳이 벽을 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달이 지난 나는, 약간의 후회를 느낀다. 나의 그릇을 벗어나, 이미 넘치고 그 바닥까지 흥건히 젖었다.

아, 찾았다.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사람이 있어도 힘들고, 사람이 없어도 힘든, 참으로 모순적인 사람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버린 나는, 우울은, 드디어 발걸음을 돌린다. 하지만 어떻게 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동이 트고 해가 다시 세상을 환히 비추고 있으니까. 어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물러 갈 것이며, 이는 나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이며, 내가 또 사라진다는 것이다. 태양 아래서의 나는 언제나 그렇듯, 밝게 웃으며, 때로는 장난을 치고, 학교에 나갈 것이다. 나는 내일 새벽에 다시 나타나겠지. (후략)

2019.04. 


19년 4월의 글이다. 나는 더이상 이렇게 글을 쓸 수 없다. 저 때는 한강이라는 장소 자체가 주는 감상이 굉장히 컸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하다. 주변 풍경을 둘러보기 보다, 그저 앞만 보고 걸을 뿐이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저 글에서 찾은 해답을 가지고 깔끔하게 무언가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건 사실 따지고 보자면 중학교 입시를 실패했을 때 부터이다. 원하는 바를 가지지 못하고, 이뤄내지 못했다. 중학교 때도, 외고 진학도 실패하고,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침몰하듯이 끝났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좀 더 신중하기로 했다. 인간 관계를 맺을 때도, 부가 활동을 할 때도, 철저히 내 이익을 고려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성공 했다면 재수를 하는 일도, 인간 관계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일도 없었겠지.

고등학교 진학 후에 나에게 도움 될 만한 것들은 닥치고 했다. 인간 관계가 넓어질 것 같아서 방송부를 선택하고, 생기부에 도움이 되라고 과학 영재도 하였다. 연애는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크게 데였기 때문이다. 그저 공부 좀 하는 친구들, 같은 동네 사는 놀 친구들, 동아리 친구들 정도로 인간 관계를 제한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엔 여러 사람들을 통해 관계가 확장되어 내가 손 쓸 수 없을 만큼 커져갔다. 그 속에서 또 가지가 뻗쳐 연인 관계로 발전한 사람도 있었고, 또 다른 친구가 된 경우도 있었다. 연인 관계였던 사람들은 모두 금방 흐지부지 되었고, 조금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든 한 사람은 SNS에 나를 특정하여 비방하는 글을 올려 약 500명 정도의 불특정 사람에게 내가 비난 받는 상황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그것이 2017년 1월 2일이었다. 공부도 못했다. 과학 영재라는 생활기록부 요소로 결정된 이과 진학은 공부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떨어뜨렸고, 흡연에, 음주에, 부모님의 속을 썩이기 일수였다. 참으로 불행한 결말이다. 완벽하게 갖춰진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정신 차려보니 양화대교 아래다. 어느덧 4시를 넘긴 시간이다. 양화대교 아래는 운동하는 공간이 있다. 벌써부터 새벽잠을 미루고 오신 어르신들로 꽤나 자리가 차 있다. 양화대교 아래 중앙에 딱 서면, 대교를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쭉 늘어 서있다. 어릴 때부터 양화대교에 오면 꼭 이 장면을 보곤 한다. 우리가 학교 미술시간에 배우던 원근법 나무가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기분이다. 묘한 안정감. 노래를 다시 바꿔본다. 


“Way back home – Shaun”


사재기 의혹이 있는 노래다. 근데 웃긴 건, 나도 사재기를 마구 욕하면서도 이 노래가 너무 좋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처음 들은 건 재수 때였다. 나는 재수학원에서 아침 6시에 일어나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아침은 인스턴트 스프로 때우고, 점심, 저녁은 고구마 말랭이로 때웠다. 물을 마시면 화장실에 가야 하니까, 물도 안 마셨다. 그렇게 11시 30분까지. 하루에 13시간 이상을 공부했다. 기숙학원이라 가능한 일이었고, 기숙학원에는 ‘휴가’라는 특이한 제도가 존재한다. 한달에 3일씩, 집에 다녀올 수 있는 기간을 주었다. 첫 휴가는 꽉 채워 나갔지만, 그 이후로는 딱 하루 정도만 필요한 것을 가지러 가고, 바로 들어와서 공부했다. 근데 어느 날, 휴가를 나간 그 날에, 귀에 굉장히 중독적인 멜로디가 들리는 것이다. 바로 옆에 있던 동생에게 물어봤다.


‘이거 무슨 노래야?’

‘이거 way back home이라고 이번에 사재기 해서 1등한 노래야.’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좋았으니까. 학원에 돌아가기 전까지 미친듯이 들었다. 왜 인지 가사가 자꾸 와 닿았다. 내 시간이 딱 19살에서 멈춘 기분이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재수를 하는 중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시간이 아까우면서도, 분명히 무언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그 가사를 계속 곱씹으면서 미친듯이 버티고, 그 전날보다 더 많이 공부하려고 하였다. 결과는 좋았다. 당연히 하루에 그런 무식한 공부 시간을 가져가는데, 성적이 안 나오면 이상한 것이었다. 근데 과정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속에서 무지하게 싸웠다. 인간 관계를 정말 안 가지고 싶었고, 실제로 실현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계획한 하루를 망치는 모든 사람들이 말그대로 적으로 보였다. 꾸준히 다녀야 할 통로에 책을 쌓아 놓는 사람과도 싸우고, 같이 담배 피자고 조장하는 사람과도 싸우고, 방을 바꾸고 싶은데 가지 말라고 붙잡던 그 사람과도 싸웠다. 바꾼 방에서도 자야 할 시간에 떠들려 하는 사람과도 싸웠다. 그럴 때마다 내가 고등학교 생활이 실패해서, 이런 고난을 겪는 것이라 생각했다. 남들처럼 대학에 있었으면 모두 무던히 넘어갈 일이었는데, 괜히 날이 바짝 서서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회의감에 휩싸였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일까. 2018년 11월, 집으로 오는 길에 후련함과 동시에 든 회의감에 썩 기분 좋게 오진 못하였다.


생각을 줄이려 나온 것이었는데, 어쩐지 생각만 점점 많아진다. 에어팟은 진작에 꺼졌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생각이 멈추지 않을 걸 알면서도 괜히 밖으로 나온다. 늘 가던 장소에 가서, 괜히 앉아도 있다가, 걷기도 하다가. 그래서 나는 왜 편안한 방안에서 작아져만 갔던 걸까. 또 이 생각으로 양화대교 위를 터벅터벅 걸어 올라간다. 대강 4시 반, 한강은 흐르고 있긴 하지만, 전혀 흐른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그저 검은색 덩어리가 땅과 다른 무언가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한강에서 빠져나와 양화대교 위에 올라간 나는 다시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붙인 후, 숨을 들이 내쉰다. 맛이 없다.


늘 이 시간에 양화대교에 오면 사람이 없어서 좋다. 저 강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을 보며 한숨을 내지르는 것은 꽤나 후련한 일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이렇게 뻥 뚫린 공간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게 찬찬히 걷다가 보면 어느새 익숙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큰 YG 엔터테인먼트 건물 사옥과 그 옆을 지키는 옛날 구조의 아파트. 다들 꼬질한 빌라에 살지만 외제차를 끄는 동네이다. 붉은 벽돌과 회색 대리석, 미친 듯이 어울리지 않게 큰 신사옥, 누구보다 가난해 보이지만,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다.


“근데 자꾸 누가 이걸 부숴 놓는 거야. 이 동네 사람들 원래부터 잘 못살고, 글도 안 읽어서 내가 시작한 일이예요. 근데 이걸 왜 자꾸 부수냐는 말이야. 8년 째 하고 있어요. 내가 이걸 혼자 말이야. 예전에 한 중학생이 이런 걸 잡았었단 말이야. 내가 그 학생하고 지금 부순 학생한테 돈 내놓으라고 할 사람이야? 아니란 말이야. 못사는 이 동네 사람들 글이나 좀 읽으라고 시작한 일인데 이러면 내가 하고싶겠냐고. 내가 당신들한테 다가올 때 싸가지 없게 굴고 그러지 않았잖아. 나는 그냥 이 동네가 발전했으면 좋겠는 마음에 한 거라고.”


저 말을 들을 때는 부정하고 있었지만, 내심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되게 이상한 동네라는 것을. 그런데도 되게 나 같다는 생각을 해서 누구보다 동네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것 저것 시도하지만, 그것이 조화롭지 못하다. 합정동은 항상 그런 느낌이었다. 재개발을 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 소원이 이뤄져 말도 안되는 크기의 주상복합 고급 주거지가 두 개나 생겼을 때, 그 옆에는 여전히 붉은 벽돌의 빌라들이 즐비했고, 여전히 그렇다. 무언가 잘해보려 하지만, 결과는 되려 엉망진창인 경우가 많다. 멋진 것 하나를 내 삶에 들여놓으면, 혹은 두 개를 들여놓으면 더 멋지고 잘난 사람이 될 줄 알았지만, 그건 굉장히 단편적인 생각이었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그건 내가 동아리에 막 들어가고, 개강 총회를 한다고 했을 때이다. 참, 외적으로 내 이상형인 사람이 앉아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쉽게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었다. 술기운에 용기를 내서 겨우 물어본 너의 전화번호였지만, 너는 그때 이미 애인이 있다고 했다. 큰 실망은 하지 않았다. 그날 안 사이였고, 관계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그때는 너무 적었다. 근데 같은 수업을 듣는 다는 것을 알고, 서로의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너가 그 애인과 헤어졌다는 것을 얼마 뒤에 알고, 너가 서울 생활에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그 틈을 파고 들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초여름 연인이 되었고, 서로의 모든 대인 관계를 놓아가면서까지 매일을 만났다.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 대부분은 관성적으로 너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너와 만나며, 나는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실제로 너가 웃으면 너무 행복했고, 너가 울거나 기분 나빠서 싫은 표정을 지으면 끊임없이 나를 탓했다. 너를 위해 시작한 일도, 너로 인해 처음 해본 것들도 정말 많다. 혹여나 내 기호가 아니지만, 너가 너무 좋아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 또한 나의 행복이라 생각했다.

근데 너가 교환 학생을 가는 순간, 무언가 많이 바뀌게 되었다. 너는 또 타지에서 생활한다는 외로움에 여러 친구를 사귀었지만, 나는 정말 덩그러니 서울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항상 옆에 있던 너가 없으니까, 나는 나 대로 약 6개월을 살아갈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했다. 그렇게 혼자서 무언가 꼼지락거리면서 해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여러 사람들과 같이 하고 싶었다. 그러한 계획들이 전부 다 잡히고 차차 진행될 때 즈음, 너가 돌아왔다. 너는 내가 다시 너에게 온전히 집중해 주길 바랬지만, 이미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하고 싶은 일이 명확했다. 내가 너와 만나면서 처음으로 너를 만나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너는 이해하지 못했다. 근데 말이야, 전이면 안 들었을 생각이 들고 말았다. 남인데 어떻게 서로를 다 이해하겠냐고,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너는 꽤나 자주 헤어지자는 말을 던졌다. 나는 그때마다 손을 벌벌 떨며 연락이 닿지 않는 너에게 닿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서로를 더 이해하고, 사랑해주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됐으면, 너는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그렇게 자주 던질 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남이기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즈음, 나는 우리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헤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더이상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 힘을 쏟기 힘들었다. 그래서 헤어지자는 말을 너에게 했다. 그때 너가 한 말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내가 이때까지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진심이었던 적은 없어.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미안해.’ 나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진심으로 사과를 구하고, 연락이 닿지 않는 너에게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비굴한 말들을 쏟아낼 수 있었던 너의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이, 나에게는 또 한 번 상처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너와 만나면서 되게 멋진 보석 같은 것들을 내 삶에 많이 들였다고 생각했지만, 순간 계획없이 들인 멋진 것들은 내 속에 있는 것들과의 부조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너를 욕하고, 비난하고,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있는 상황이 어떻든, 너는 나의 20대 초반 그 자체였고, 어쩌면 나보다 더 나다움을 투영하고 살았던 존재였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너에 대해 글을 쓰거나, 너를 곱씹는 일은 없을 거야. 나로 인해 상처 받았을 너에게 마지막으로 사과를 구할 뿐이야.


패딩을 입어도 추워진 몸을 끌고, 다시 초록 대문과 붉은 벽돌이 맞이하는 우리 집으로 돌아온다. 강아지가 번뜩 잠에서 깨 나를 맞이해준다. 물그릇에 빈 물을 채워주고, 패딩도 벗지 않은 채로 강아지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다섯시가 넘었다. 패딩을 벗고, 옷을 다시 잠옷으로 갈아입고 손을 씻는다. 강아지가 쓰다듬어 달라고 보채기에, 다시 거실로 나가 너를 쓰다듬어주며 지긋이 쳐다본다.


우리집에 온지 햇수로 6년 된 우리 강아지. 발작으로 병원에 급히 데려갔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는 얘기를 들은 우리 강아지.

너를 처음 데려왔을 때가 생각이 나. 6개월 전 떠난 강아지에 온 가족이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유기견 보호 센터에서 너를 데려오자는 쪽으로 가족의 의견이 모였어. 그래서 나는 학원 끝나고 급히 너가 있다는 부천으로 갔지. 차를 타고 오면서 창밖을 보던 너가 너무 귀여웠고, 앞으로의 20년 정도를 책임지겠다고 생각 했어.

근데 말이야. 얼마 전에 너가 부엌에서 큰 소리를 내며 뒹굴고 있기에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어. 이미 늦었다고 하더라. 그리고 나서 나오는 말이 너무 뻔하더라. ‘얼마나 남았나요.’ 가끔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 그런 대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런 뻔한 말을 아직 쓰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비웃었어. 근데 나한테 그 상황이 닥치니까, 할 수 있는 말이 그것 밖에 없더라. 너와 비슷한 종류의 견종이 잘 걸리는 병에 걸려서 길어야 반년 정도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데, 그 날 아침 너한테 화를 내던 나의 모습이 떠오르더라고. 그 외에도 여러 상황이 머리에 스치더라. 연명을 위해서 한달에 너에게 들어가야하는 약값과 병원비가 거진 100만원 돈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생각보다 너무 많이 든다는 생각을 한 나 자신이 혐오스럽더라. 그러고 너를 입원시키고 돌아온 집에서 가족끼리 남은 기간 잘 해주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정말 이미 죽은 것처럼 널 대하는 건 아닐까 생각도 했어. 너를 전처럼 친구 같이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고, 초기에 발견했어도 손 쓸 도리가 없다는 병원에 말에도 나는 왜 좀 더 너의 병을 이르게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감에 시달렸어.

근데 울아. 요즘 너가 행복해 보여서 정말 다행이야. 지금도 그저 아파만 보인다면, 그건 더이상 내가 집에 못 있을 만큼 힘들 것 같아. 너에게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던 나라, 보호자라 미안하고, 하염없이 사랑해.


적당히 강아지를 쓰다듬어주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온다. 인센스 스틱 하나를 태운다. ‘Patchouli’.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이다. 불은 간접조명으로, 옷 정리는 패딩 정도만 옷장에 넣어 둔다. 텔레비전을 틀고, 매일 자기 전에 틀어 놓는 세시간 정도의 영상을 재생한다. 편안한 분위기이다. 근데도 나는 여전히 작다. 생각이 여전히 과거와 현재를 들쑤신다. 나는 너무 내 희망에 비해 작고, 완벽하지 못하며, 서투른 사람이다. 지금의 상황만 봐도, 악화만 되어갈 뿐이다. 점점 완벽함에선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내가 원하는 완벽함; 적당한 대인관계, 꽤 높은 벌이, 한강이 보이는 집, 단란한 가정. 떠오르는 게 이 정도이다. 아직 근처도 못 가본 것들이라 가지고 싶지만, 못 가질까 불안해 하는 거야? 아니, 너는 가져보지도 못한 것을 잃을까봐 불안해 떠는 사람이야. 너가 이때까지 살아온 내용을 다시 훑어봐. 너는 너가 원하는 완벽함 근처에 간 적도, 그것을 가지기 위한 계획도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지만, 너는 20년 정도를 불안해 하고 있잖아. 너, 그 정도면 이미 너는 미래에 그걸 가졌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걸 잃을까 걱정하는 수준이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뭐가 아니야. 너 쭉 그렇게 살아왔어. 이제야 좀 마주볼 수 있게 된 거 뿐이야. 주변에 너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도 많고, 너보다 경제적 배경이 좋은 애들도 많고, 너보다 잘생기고, 키 크고, 매력 있는 애들이 차고 넘치는데, 너가 어떻게 완벽한 사람이 돼? 너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되어야 해. 괜히 튀려고 할 수로 결국은 미움만 돌아올 거야. 너가 원해서 만든 학회 조차 버거워 하고, 너가 꿈이라고 말하는 것 조차 힘들어서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라 하지 않아.

내가 그럼 뭐 어떻게 할까. 지금 하는 거 다 던져버리고 어디 깊은 산 속이라도 들어가길 바라는 거야?

아니야. 그냥 계속 그렇게 살아. 너는 절대 못 바뀔 거야. 그냥 방구석에서 너의 이상 세계나 그리면서 부러지고, 또 부러지고, 그러다가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러지게 되면, 너 스스로가 알아서 포기하게 될 거야. 너가 숨막히는 거, 나는 왜 그런지 알고 있어.

왜?

그건 너가 부러지고 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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