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우 Dec 27. 2022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비 맞고 행복해질 줄 몰랐습니다

스물 여섯에 미국 보스턴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돌아보면 군 제대 후 바로 떠난 연수라 사회성이 떨어져서인지 두 달 정도는 그 누구와도 쉬이 친해지지 못했다. 하얗고 밝은 낯빛과는 달리 어두운 느낌을 주는 무표정한 얼굴 탓에 아마 내게 다가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매사 끈기 있는 성격 덕에, 두 달간 매일 참석한 방과 후 활동을 통해친구들을 사귄 것이다. 그 곳에서 처음 친해진 친구들은 남은 평생에 역사 이야기는 꺼내보지도 못할 일본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붙임성 있는 한국인 몇몇과도 친해졌다.


우리는 수업을 마치면 항상 어딘가 갈 곳을 찾아다녔고, 점점 더 먼 곳을 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는 조별과제를 하는 대학생들처럼 삐걱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다 자신의 취향마저 감추는 일본 친구들, 그리고 햇살보다 더 해맑은 한국인 동생들 틈에서 <뉴욕-나이아가라 폭포-토론토> 여행을 계획했다. 그땐 정말 고군분투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었다.


“Aya, Yuki. Where do you wanna go in New York and Toronto?” 라고 내가 묻자, 그들이 곧장 대답했다. “Yoon~, We just follow you. I like everything.” 마치 “뭐 먹을래?” “아무거나 다 좋아.” 같은 이 문답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반복됐다.


착하고 배려있는 일본인 친구 아야, 유키. 틈만 나면 덤비는 다예, 스물한 살 막내 소미. 우리 5명은 버스를 타고 뉴욕을 잠시 들렀다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향했다. 생각해보면 우린 모두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온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섬과 다를 바 없는 반도인들과 진짜 섬나라 사람만이 느꼈던 느낌이었을 수도 있다. 국경선에서 사진을 넉넉히 찍은 후, 우리는 그토록 고대했던 나이아가라 폭포에 도착했다.


일단 우리는 캐나다의 스타벅스라는 ‘팀 홀튼’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우리 모두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큼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국경을 넘어오자마자 핸드폰이 안 된다는 둥, 국경 부근이라 달러를 받는다는 둥 이 여행이 아니었다면 나눌 수가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도 사람을 하루종일 방방 들뜨게 하는 게 여행이었다.


숙소를 폭포 근처로 잡은 우리는 저녁 산책으로 폭포를 따라 걸었다. 보라색 조명을 비춘 폭포는 낮에 보던 시원한 광경과는 다르게 무서운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대충 오다 마는 보스턴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런 비를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장대비였다. 처음엔 비를 피해 보려고 이리저리 뛰기도 했지만 되는 일이 아니었다.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나는 카메라를 가려보려다 포기했고, 친구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놓았다. 그 후로 우리는 내내 웃으며 행복했다. 젖지 않으려고 할 때까지만 싫은 게 비였다. 생쥐같이 비를 흠뻑 맞으며 들른 버거킹에서 안주거리를 사온 우리는 숙소에서 한참 또 수다를 떨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비를 맞으며 돌아다닌 게 처음인 거 같아. 비가 오면 우산을 사면 그만이었잖아. 오랜만에 비 맞으니까 이상하게 좋지 않아(그땐 영어로 했다)?”라며 운을 띄우자, 휴지 뭉텅이로 젖은 신발을 꾹꾹 누르고 있던 유키도, 한쪽 다리를 의자에 걸치고 맥주를 마시던 다예도 각자 특유의 영어 스타일로 오늘에 대한 소회를 이야기했다. 다음날 일정을 생각해서 늦지 않게 술자리를 파했지만, 돌아갈 날이 아직 많이 남은 여행 첫 날이 주는 설렘은 불을 끈 뒤에도 수다로 이어졌다.


그날 비를 함께 맞으며 약간의 전우애?를 느꼈던 우리는 각자의 나라로 돌아온 후에도 가끔씩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일본에 간 적도 있었고 그들이 한국에 오기도 했다. 그 여행이 함께 떠난 유일한 여행이 아니었음에도 우리는 언제나 그 여행을 가장 먼저 이야기하곤 했다. 모두가 이견없이 온전히 행복했던 며칠이었다.


앞으로 사는 동안 나이아가라 폭포를 갈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때가 벌써 10년 전이라는 걸 떠올리면 아마 앞으로도 그곳을 갈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그 장소와 그때의 추억이 직결된다. 어디서 ‘나이아가라’라는 말이 들리면 신나서 꺼내놓는 내 추억처럼, 내 친구들도 ‘나이아가라’ 하면 내가 생각나겠지.

작가의 이전글 노래를 잘하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