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칵테일의 사랑’, 나의 애창곡이다. 덩치에 맞지 않은 선곡에 친구들은 질색을 한다. 그래도 꿋꿋이 이 노래를 부르면 추억이 따라온다. 나와 은희는 동시대를 살았다. 김일성의 사망 소식엔 금방 통일이 될 것만 같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얼마 안 돼 연이어 발생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 그리고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고에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풍요로워 보이는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친구 대하는 법을 몰라 외로워했다. 아버지는 엄마의 밥이 맛이 없다 하셨고 친구들과의 여행엔 항상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아버지는 가끔 그 친구들과 다투셨고 가끔 엄마의 밥상을 엎으셨다. 주변의 작은 파도에도 내 마음은 거세게 울렁댔다. 선생님 앞에서 책가방을 내던지고 반항을 밥 먹듯 하면서도 퇴학을 당하지 않은 걸 보면 딱 은희 정도의 말썽을 피운 것 같다. 그래도 좋은 기억이 있다. 토요일 3교시가 끝나면 구역을 나눠 대청소를 했다. 그때 청소시간마다 흘러나오는 노래가 ‘칵테일의 사랑’이었다. 울렁이던 사춘기 시절의 내 마음이 잠시나마 잔잔해지던 순간이었다. 음악과 함께 내려앉은 토요일의 낮 햇살이 내 불안한 마음을 가만히 감싸주었다.
은희는 남자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칵테일의 사랑’을 녹음한다. 고민은 없고 설렘만 가득한 소녀의 모습이다. 얼마지 않아 놀이터에서 만난 친구 어머니의 ‘애가 그 방앗간 집 딸이냐’는 한마디는 소녀의 사랑을 그저 순수하게 두지 않는다. 영화 ‘벌새’는 삶의 부조화 속에서 흔들리고 불안해하는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 이슈’를 적절히 버무려 묘사한다. 사실 어느 한쪽만으로 세상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은희의 그 시절은 외롭다. 엄마, 아빠는 방앗간 일로 바쁘고 오빠는 은희를 때린다. 그나마 마음이 통하는 언니는 혼자 버티는 것도 버거워 보인다. 그런 은희에게 한문 선생 영지의 존재는 소중했다. 영화 속 영지와 은희가 같은 왼손잡이라는 설정은 이제 은희에게도 의지할 사람이 생길 수 있음을 암시한다. 영지는 외로운 은희에게 차를 내어주기도 하고, 가만히 있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 말해주기도 한다. 영지의 말은 사춘기 소녀를 통과해 세상의 모든 소외된 이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영지로 인해 은희는 위로받고 세상을 향해 꿈틀거릴 용기를 얻는다. 그러한 영지가 성수대교 붕괴로 생을 마무리한다는 설정은 마치 은둔하던 사부가 주인공에게 비기 전수를 완료한 후 적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무협지의 흔한 설정과 다르지 않다. 물론 성수대교 붕괴와 당시의 큰 사건들이 우리 사회에 준 상처를 무시할 수 없었던 감독의 시대정신을 가만하고서라도 욕심이 좀 과해 보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참 녹록지 않다. 세상은 끊임없이 요동치고 나는 중심을 잡기 힘들다. 언제쯤 잔잔해질까 하고 기다려봤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경제발전으로 빈곤이 해결되는가 싶더니 불평등이 심화된다. 소외층을 대변하던 집단은 어느새 기득권이 되어있다. 서민들의 법률서비스 확장을 위해 만든 로스쿨이 서민들에겐 더 높은 진입장벽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세상은 어차피 장단이 있고 결국은 될 대로 된다는 허무주의에 빠질 만도 하다. 자칫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니 현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자기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는 가끔 기득권의 논리를 대변하는 데 사용된다. 누군가는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에 저항하며 모든 걸 바쳐 투쟁한다. 내겐 그런 용기가 없었다. 그냥 무언가가 이끄는 대로 휩쓸렸다. 버티다 보니 학교를 마쳤고 인생한방을 노리며 고시공부를 했다. 적당한 시기에 포기를 했고 답답한 마음에 해외로 나갔다. 뜻하지 않게 돈이 벌렸고 의도치 않게 파산을 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내 마음대로 됐던 적은 없었다. 힘들어서 한국에 돌아왔고 죽을 것 같아서 담배를 끊었다. 분명히 힘든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방안에 처박혀서 할 수 있는 것이 나에 대해 적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나를 잘 모르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많다. 그래도 통증은 무뎌졌고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속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생겼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하나둘씩 좋은 일들이 생긴다. 바닥을 찍고 나니 올라갈 힘이 생긴다. “행복의 기원”이란 책에서 사람은 ‘행복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도 살아내려고 희망을 쥐어짜 낸 것인지 모르겠다.
누구나 힘든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반드시 온다는 희망이 필요하다. 그 희망이 이 거친 세상에서 그나마 버티게는 해주는 힘이 된다. 버텨야 산다. 살아야 노래도 부르고 사랑도 한다. 살아야 원망도 하고 투쟁도 한다. 우리 곁의 수많은 은희들에게 영지 선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희망은 빛이 되고 그 빛이 은희를 비추면 은희가 환하게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영지 선생의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 ‘’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지워지지 않는다. 트램펄린을 뛰는 은희에게 비치던 햇살이 어느 토요일 나에게 비치던 햇살과 오버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