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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연필 Sep 27. 2024

바튼 아카데미(추억여행)

영화 에세이


 강당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합창소리, 그리고 눈 내리는 교정의 풍경들 사이로 들리는 포크음악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80~90년대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TV에서 늘 방영되던 친숙한 분위기의 영화다. 오랜만에 마음이 평화롭고 입꼬리는 올라간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불러오는 나의 추억 때문일 수도 있고 현재의 번잡하고 무더운 내 일상과는 다른 화면 속 분위기에 순간 취해서일 수도 있다.


 멀리서 보여주는 교정의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멀리 창밖을 비추던 카메라가 재떨이와 화장실 등 지저분한 방안을 하나씩 보여주며 영화는 바튼 아카데미의 일상으로 들어간다. 스크루지 영감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의 역사선생 폴은 혼자 채점을 하며 고집 센 어투로 아이들의 험담을 한다. 처음에는 그런 그의 모습마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크리스마스 영화가 갖고 있는 따뜻한 분위기와 그에 걸맞은 아름다운 결말이 예견돼서다.


 그러나 별다른 반전 없는 이 영화에 조금씩 몰입됐다. 더 이상 난 멀리서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이 영화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폴의 원칙주의는 답답해 보였고, 아이들에게 형편없는 점수를 주며 재시험의 기회마저 박탈한 심술에는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고약한 노 교사의 고집 때문에 애들의 인생이 꼬이는구나…싶었다.


 영화를 보든 축구를 보든 몰입을 하면 어느 한 편에 서게 된다. 그때부터 다른 편의 입장을 이해하긴 어렵다. 보이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편을 찾고 무리를 지어 사는 것은 생존에 꼭 필요한 본능이었다. 본능을 자극하는 데는 감정이 사용된다. 그래서일까 멀리서 봤을 땐 아름답고 별일 아닐 것 같은 일들이 가까이 다가가 한쪽 편에 서는 순간 감정이 요동쳤고 좋고 싫음이 생겼나다. 어느 순간 나는 학생들 편에 서있었다.


  장소는 소도시의 명문 고등학교다. 학생들은 대부분 부잣집 도련님들이다. 교사 폴은 다채로운 사람이다. 아들을 잃은 조리사 메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꽤나 따뜻하지만,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인색하다.  동료 직원의 크리스마스 쿠키를 받고도 고맙다는 말을 하기 힘든 그는 외로워 보인다. 지나온 그의 삶이 궁금하다.


 하버드 시절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부자 동창생을 차로 받아버린 사건, 대학 학비가 없어 베트남전에 참전해 사망한 아들을 둔 메리를 위하는 마음 등을 보며 어렴풋이 폴의 마음을 짐작해 볼 뿐이다. 처음 바튼 스쿨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는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기준을 세워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좌절했을 것이다. 명절이니 애들에게 잘해주라는 메리의 부탁에 ‘평생 복에 겨워 살아온 애들’이라고 말하는 폴. 그의 닫힌 마음은 쉽게 열릴 것 같지 않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세 사람이 학교에 남아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다. 크리스마스에 엄마로부터 방치된 학생 털리, 친구 없는 독신 교사 폴, 그리고 아들을 떠나보낸 조리사 메리. 서로 각자의 이유로 외로운 세 사람이 함께하면서 영화는 전혀 다른 세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어떻게 ‘함께’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키는 ‘앙트레 누(둘만이 아는 비밀)‘. 첫 번째 앙트레 누는 털리가 내미는 손(환대)이다. 학교에서 팔이 빠진 털리는 폴의 해임을 막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마지막 앙트레 누는 폴의 작별인사다. 폴은 거짓말을 하며 털리의 퇴학을 막아주었고 그 대가로 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들은 ‘둘만이 아는 비밀’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이해해 갔다. 그렇게 서로의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는 폴의 투정이 영화를 관통한다.


 기존의 편견을 버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가끔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희생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런 이해만이 위안이 된다. 그 시작이 어렵다면 영화처럼 함께 여행이라도 가보자. 평소와 다른 장소가 다른 생각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이 영화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편견을 깨 나가며 서로를 이해하고 힘이 되어준다는 ‘해피엔딩?’의 영화다. (그러나 그 후의 이야기를 영화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머지않아 또 서로를 오해하고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그때마다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는 베트남전에 지쳐있던 불안과 혼동의 시대다. 영화의 큰 줄기인 ‘갈등’을 상징하는 시대지만 막 달 착륙에 성공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영화의 배경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를 1970년대 영화로 만들고자 했던 감독의 다양한 의도가 보인다. 그 시대(사람)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사람)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한편으론 시간이(혹은 공간을) 지나 멀리 떨어져서 보면 타인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고, 그리고 가장 힘든 시기가 한편으론 꽤 찬란한 시절일 수도 있다고 전하는 듯했다. 주인공들의 시련이 서로를 성장시켜 준 기회가 된 것처럼.

 

  뻔해 보이는 스토리가 1970년대 감성으로 아름답게 포장돼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그래서 (내가 느끼고 싶은?) 감독의 속내에 더욱 설득된다. 오랜만에 느껴본 온기를 담아, 떠나는 폴에게 조용히 외친다. ‘Take care &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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