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햇빛이 들다 만 창가에 빨래가 널려 있다.
스타킹과 여자 속옷 그리고 바지 몇 벌.
집에 들어온 아이는 열쇠와 가방을 내려놓고 익숙한 듯 팔을 뻗어 빨래를 걷는다.
아이의 옷이라고 보기엔 꽤 성숙한 여성의 옷들이다.
빨래를 정리하다 집어 든 브래지어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접어 정리한다.
아이의 의젓한 행동이 어색해 보이는 건 담담하면서도 쓸쓸한 아이의 표정 때문이다.
식탁에 놓인 삼각김밥을 먹는다.
김이 유독 바스락거린다.
일본의 김은 한국보다 두껍고 바삭한가 하고 부러워질 때쯤, 쓰레기통에 잔뜩 쌓인 김밥 포장지가 눈에 들어온다.
조용한 집이라 작은 소리 하나도 또렷이 들린다.
그리고 카메라는 정리되지 않은 집안 곳곳을 비춘다.
깊숙이 들어오지 않는 햇빛, 불 꺼진 거실.
너무 조용해서 열쇠 놓는 소리부터 김 부스러지는 소리까지 또렷한 이 집은 11살 토모의 마음을 닮은 듯하다.
늦은 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온 엄마는 구토를 하고 바로 잠이 든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토모는 엄마의 가출(?)을 확인하고 익숙한 듯 외삼촌을 찾아간다.
예전과 다르게 외삼촌의 집에는 함께 지내는 애인 린코가 있다.
조금은 특별한 린코도 마음속에 조용한 집이 있다.
그래서 세상의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고 쉽게 울렁거린다.
다행인 건 토모의 조용한 진심도 린코에겐 꽤나 잘 들린다.
그렇게 세 사람이 ‘엮인’ 동거가 시작된다.
어느 날 토모는 슈퍼에서 만난 친구의 엄마를 밀치고 주방 세제를 뿌린다.
경찰서에 불려 갔지만, “왜 그랬냐?”는 린코의 물음에 입을 다문다.
‘이상한 사람’이란 말에 상처받을 린코를 걱정해서일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엄마와 사는 특별한 친구 카이가 안쓰러워서일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필사의 방어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토모에게 가장 필요한 건 엄마의 자리를 채워 주고 있는 린코다.
경찰서를 나오며 토모는 린코의 손을 잡는다.
린코에게도 토모가 소중하다.
그들의 진심이 하나둘 엮여 가면서 린코에게는 꿈이 생겨났다.
셋이 가족이 되어 함께 살고 싶다는 바람.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마키오에게 이야기한다.
남자로 태어난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는 외삼촌, 그리고 엄마의 가슴이 그리운 아이가 모여 만드는 가족.
린코가 꿈꾸는 가족은 어쩌면 진심으로 이상해 보인다.
그런데 세상은 원래부터 이상했다.
내가 너무 느리거나 빨라서 보지 못한 것들은 낯설고 이상하다.
나와 다른 곳에 서서 다른 것들을 보는 타인도 이상하다.
케이팝을 목놓아 부르는 프랑스인, 한국보다 싼 일본의 물가, AI에게 위로받는 사람들, 로봇과 사랑에 빠질 사람들…
세상엔 이상한 것들과 이상할 것들 천지다.
낯선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상하다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일 뿐, 그것이 곧 틀리거나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이상하다고 배척하고 혐오하는 많은 것들이 그냥 낯선 것일지 모른다.
낯선 것은 익숙해지기 전의 풍경일 뿐이다.
처음 방문한 낯선 외국의 풍경이 이상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풍경도 익숙해진다.
린코도, 그녀가 꿈꾸는 가족도 언젠간 익숙해질 낯선 풍경이다.
방황이 끝난 것인지, 아니면 휴식이 끝난 것인지 토모의 엄마 히로미가 돌아온다.
린코가 "토모를 키우고 싶다"라고 말하자, 히로미는 "당신은 여자도 엄마도 아니다"라며 폭언을 퍼붓는다.
토모는 그런 엄마를 향해 ‘왜 린코처럼 엄마 노릇을 해주지 않았냐고, 왜 이제야 찾으러 왔냐고’ 원망한다.
히로미의 울부짖음처럼 그녀도 숨이 막히도록 힘들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혼자도 감당하기 힘든 히로미에게 엄마라는 역할은 너무 버거워 보인다.
반면 린코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성숙하다.
엄마를 따라가겠다는 토모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성숙함은 나이나 역할로 정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삼촌 집을 떠나온 토모는 다시 문을 열고 조용한 집에 들어간다.
열쇠와 가방을 내려놓고 익숙한 듯 커튼을 걷는다.
거실 깊이 비추는 햇빛 안에서 린코의 선물을 뜯는다.
털실로 ‘엮은’ 두 개의 가슴.
그 위에 살포시 손을 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