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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희영기행작가 Apr 17. 2023

[영남알프스 전설따라]대운산 절골(대원사) 빈대 이야기

문전성시 귀찮은 주지승 큰길내다 땅속 석불 훼손 절에 빈대 들끓어 폐사

당시 빈대소로 추정되는 계곡

대운산(大雲山·742m)은 울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양산시의 경계에 걸쳐있는 산으로 신라 원효대사의 마지막 수도처로 알려져 있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에는 불광산(佛光山)으로 되어 있으나 언제부터 대운산(大雲山)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산자락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장안사를 비롯하여 척판암, 내원암, 백련암 등 이름난 암자가 여러 개 있다. 대운산을 오르다 보면 대운교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계곡이 갈라지는데, 오른쪽 계곡은 내원골과 절터 골로 왼쪽은 도통골과 박치골로 이어진다. 옛날 절터 골에는 대원사라 하는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남목(南牧)의 열암사(裂菴寺), 연암의 백연암(白蓮庵), 웅촌의 운흥사(雲興寺), 율리의 망해사(望海寺)와 청송사(靑松寺), 언양의 연고사(連高寺), 삼남(三南)의 석수사(石水寺)와 같이 등재되었던 이름난 절이다. 그러나 대원사는 정조(正祖) 10년(1786)에 폐사되고 지금은 그 절터만 남아 있다. 대원사의 내력은 절터에 남아 있던 현하당(縣河堂)이라 음각된 부도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이 부도에 새겨진 이름으로 살펴보면 당시 현하당이라는 스님이 대원사(大原寺)에 있었던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 외의 사적(寺蹟)은 전해지지 않는다. 을축년(1925)에 불이 나 전소가 돼 사찰 명맥만 유지하다가 그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현재의 내원암 대웅전은 1992년 송암 스님의 역사를 일으켜 1993년 중창하였으며, 칠성각은 1994년 완공했다고 한다. 

대운산 철쭉
대운산 철쭉

# 5월에 핀 대운산 철쭉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목소리로 서로를 분간하지만, 꽃들은 향기로서 서로를 분간하며 대화한다고 한다. 꽃들은 사람보다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의 말은 사랑하는 연인끼리 제외하고는 꽃만큼 미묘한 감정과 좋은 향기를 풍기지 않는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페히너(fechner)의 글이다.

진달래가 피고 난 뒤 산천에는 철쭉꽃이 온산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철쭉꽃 / 진희영 


 너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내 너의 영혼을 가슴에 묻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입고 간 옷깃이라도 너를 베어오고 싶다.

 가슴 깊숙이 꾹꾹 눌러 오래오래 너를 간직하고 싶다.


대운산은 매년 진달래, 철쭉꽃 축제가 열리는 명소로 산 7부 능선에서 정상에 이르는 꽃길은 아름답다 못해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등산객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곳이다. 

대운산 내원사 경관

# 한때 문전성시를 이룬 대원사(大原寺)


이 절이 패망하게 된 사연은 사람들 사이에 빈대와 관련된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대원사는 동국여지승람에 오를 정도로 크고 이름난 절이었으니 당연히 신도들이 많이 찾아드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런데 주지승은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몹시 귀찮게 생각했다. 주지승은 입버릇처럼 우리 절에 제발 사람들이 적게 찾아왔으면 좋을 텐데 하며, 절에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핀잔을 주는 것은 다반사였으며, 공양도 제대로 못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삿갓을 쓴 길을 가던 과객이 절을 찾아와서 잠시 쉬어 가게 되었다. 이때 주지승이 삿갓을 쓴 과객을 핀잔이라도 하듯이 “우리 절에는 하도 사람들이 많이 와 귀찮아 죽을 지경이요. 제발 사람들이 오지 않게 할 수 없을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과객이 “그런 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니 그리 근심치 않아도 될 일 올 시다"하자, 주지승은 귀를 쫑긋 세우며 과객에게 “당신이 뭘 안다고, 이 일을 해결이라도 해준다면 내 손에 장이라도 지지겠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마침 그날은 관음재일(관세음보살님께 공양을 올리는 기도 재일)이라 많은 신도가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느라 북새통을 이루었다. 


과객은 “내가 이 절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알려주겠소"라며 둘러보니 신도들이 부처님 전에 올릴 공양미며 과일을 머리에 이고, 어깨에 메고, 손에 들고 오고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 전에 기도를 올리며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탑을 돌면서 열심히 아미타불을 염송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절을 한 바퀴 둘러본 과객은 주지승을 만나 앞으로 열흘 내 “마을로 내려가는 산모퉁이에 큰길을 내게 되면 소원대로 될 것이요"하고 홀연히 떠났다. 


# 대원사(大原寺)의 빈대


이튿날 과객의 이야기를 들은 주지승은 마을 사람들을 대동하여 산모퉁이에 땅을 파고 길을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업 도중 땅속에서 누워있는 석불 한 구가 삽과 괭이에 찍혀 목이 떨어지면서 발견됐다. 떨어진 목에서는 피까지 흘러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라 떨어져 나간 석불의 목을 붙이려 했지만 이미 떨어져 나간 부분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어쩔 줄 몰라 돌부처를 다시 그 자리에 다시 묻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 뒤 절에는 갑작스럽게 빈대가 들끓기 시작했다. 신도들이 공양하는 요사채는 물론이거니와 절 법당 구석구석에도 빈대가 들끓어 사람들을 물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빈대 때문에 절을 찾은 사람들은 견딜 수가 없게 되었고, 빈대 때문에 절에 잠시라도 머물 수 없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절에는 자연적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고, 절은 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절을 찾은 마을 사람들은 절터 주변의 바위를 뒤져보면 빈대 껍질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당시 빈대를 쓸어 담아 웅덩이에 버렸는데, 빈대를 버린 웅덩이를 빈대 소(沼)라고 하며 절 바로 왼쪽 계곡에 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운산을 오르다 보면 대운교를 건너면 길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지고, 계곡 역시 좌우로 갈라지는데, 오른쪽이 내원골, 왼쪽은 대운천으로 도통골과 박치골로 이어지는 계곡이다. 마을 사람들의 구술에 의하면 왼쪽으로 흐르는 도통골과 박치골 방면은 당시 겨우 사람이 다닐 수 있던 작은 길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원사 괴팍한 주지승이 길을 하나 더 냄으로 인해 절에 모여 있던 산의 정기가 빠짐으로 인해 폐사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 참고자료 : '울주설화' 울주향토연구소


☞ 이 이야기는 필자가 30여년전 당시 울주군 온양면 운화리 상대마을에 사는 동네 아주머니 한 분으로부터 채록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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