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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희영기행작가 May 12. 2023

[영남알프스 전설따라]천성산과 원효대사

당나라서 온 1천명의 승려 득도의 길로 인도한 자연 도량

내원사 건립하고 89개 암자 지어
산 중턱 너른 화엄벌서 설법 강론
제자 모두 화엄경 통달 성인 반열
의상대사와 의형제 맺은 장소로도

원효대사는 천성산 화엄벌에서 당나라에서 온 1천여 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강론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사진은 천성산 화엄벌 경관

천성산은 영남알프스의 주봉인 가지산이 서서히 남진하면서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정족산, 부산 몰운대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한 구간이다. 그 옛날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1천명의 승려를 천성산 화엄벌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해 모두 득도하였다는 전설에서 천성산(千聖山)이라 부른다. 천성산은 많은 계곡과 폭포, 봄철의 진달래, 철쭉꽃이 무리를 지어 피고, 가을철에는 온산이 만산홍엽을 이룬다.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전설과 원효대사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흘러내리는 계류의 소(昭)와 담(潭)은 아름답다 못해 마음껏 멋을 부린 조물주의 능란한 솜씨가 곳곳에 숨어있는 것 같다. 해서 예로부터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 불렀다. 또한 천성산은 원효대사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으로 그와 관련된 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천성산 짚북재 경관

# 당나라 유학길 해골물 마시고 깨달음


원효대사(617~686)의 성(姓)은 설(薛)이다. 아명은 서당(誓幢), 신당(新幢)이고, 이름은 사례(思禮). 원효라는 이름은 출가한 뒤 지은 이름으로, 첫새벽(始旦)을 뜻한다.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 내말 설담날의 아들이다. 원효는 소년 시절엔 화랑도였다. 전쟁터를 누비면서 많은 죽음을 보았고, 어린 소년은 많은 죽음 앞에서 허무에 시달렸다. 삶이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멸의 허무에 시달리던 원효는 15~16세 때 황룡사(黃龍寺)에서 승려가 될 것을 결심한다. 황룡사에서 스님이 된 원효는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여행 도중 굴속에서 자다가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는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라는 깨달음을 터득하고는 되돌아왔다. 그리고 저잣거리의 거지나 미친 사람 주정꾼들과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며 서라벌을 누볐다. 사람들로부터 괴이한 요승이란 소릴 들으면서도 화엄경을 설파했다.


 靑山疊疊彌陀窟(청산첩첩미타굴)

 滄海茫茫寂滅宮(창해망망적멸궁)


 첩첩한 푸른 산은 아미타의 굴이요

 망망한 큰 바다는 적멸의 궁전이로다.


원효대사-오도송(悟道頌·선승들이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읊은 선시(禪詩))


원효는 이곳 천성산에서 득도한 뒤 일심사상 (一心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 무애사상(無碍思想) 3대 불교 사상체계를 정립시켰으며 89개 암자를 세우는 등 많은 자취를 남겼다. 이들 암자는 지금 대부분 사라지고 7~8개만 남아있다. 삼국유사 등 여러 기록으로 볼 때 원효대사는 전국 각처의 수도처 중에서도 천성산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원효대사가 머물었던 척판암 경관

# 척판암(擲板庵)서 판자 던저  1천명 대중 살려 


척판암(擲板庵)은 신라 문무왕 1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암자로서 당시에는 '담운사'라 불리웠다. 전설에 의하면 척판암(擲板庵)은 던질-척(擲), 판자-판(版), 암자-암(庵) 즉 판자를 던진 암자라는 뜻으로 척판암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척판암은  암벽이 병풍처럼 돌려져 있고, 앞은 절벽인데 그사이에 사람 혼자 앉을 만한 자리가 있는 좁은 공간이었다. 대사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를 올리며, 도를 닦았고, 오랜 세월이 지나 대사는 도를 터득하였다.


어느 여름날 신라의 원효(元曉) 스님이, 척판암에서 선정(禪定·깊은 삼매에 드는 상태)에 들어있었다. 문득 관(觀)하여 세상을 살펴보니, 당나라(중국)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뒷산이 여름 장마로 무너져 내리려는 형국이었다. 그때 운제사에는 1천명이 넘는 대중(大衆)이 큰 스님의 설법을 들으며 정진하고 있었다. 원효 스님은 위급함을 알고 깔고 앉아 있던 널빤지를 그곳으로 날려 보냈다. 


그때 운제사의 한 스님이 도량을 거닐다가 이상한 물건이 마당 한가운데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빙빙 돌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대중들에게 알렸다. 법당 안에 있던 천여 명의 대중들이 공중에 떠도는 이상한 물체를 보려고 모두 마당으로 나오자, 그 순간에 뒷산이 무너져 내리면서 법당을 덮쳐 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졌다. 


아슬아슬하게 기적처럼 목숨을 건진 대중은 공중에 떠 있는 물체를 향해 합장 기도를 드렸더니, 그 널빤지가 마당에 떨어졌는데,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救衆)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해동의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비로봉이라 불리는 천성산 2봉

간신히 목숨을 건진 1천명의 대중들은 원효의 도력(道力)을 흠모하여 신라 땅으로 원효를 찾아와서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였다. 이에 대사는 그들이 머물며 수도(修道)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산신이 마중을 나와서 안내를 했는데 지금의 산신각(山神閣) 자리에 이르자 산신은 사라졌다 한다. 


원효대사는 산신이 사라진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정족봉(鼎足峰) 대둔대(大芚臺)에 올라 세 줄기의 산맥을 둘러보고, 삼둔(三芚-중둔암, 대둔암, 소둔암), 삼방(三防-장방사, 중방사, 소방사), 삼적(三寂-원적암, 명적암, 묘적암)등에 89암자를 세웠다고 전하며, 천 명의 스님은 이곳에서 안거했다고 한다. 


# 목숨 건진  스님들 제자 되길 간청


원효암에서 의상대 아래로 난 길을 따라 1.7㎞정도 걸어가면 화엄벌이 소(牛)의 등처럼 펀펀하게 나타난다. 원효는 천성산 화엄벌에서 당나라에서 온 천여 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의상대사와 의형제를 맺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가을철이면 키가 그리 크지 않은 억새들의 천국이 펼쳐지고, 봄철이면 진달래, 철쭉꽃이 무리를 지어 아름답기가 그지 없다. 화엄벌은 35만 평가량이고 화엄늪은 3만5,000평 정도이다. 화엄벌을 관찰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풀이 자라지 않는 곳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데 이곳은 원효가 화엄경 강독 때 책을 놓은 자리라고 한다. 


# 짚으로 만든 북을 매달아 놓은 짚북재


짚북재에는 짚으로 만든 커다란 북을 달아놓고 산내의 모든 암자(89 암자)에 흩어져 있는 1천여 명의 제자들이 북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모이게 했으므로 집북재란 이름이 생겼다. 


어느 날 탁발 갔던 제자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져 양식을 다 쏟고 빈손으로 돌아오자 원효가 흰 종이 한 장을 그 자리에 버리고 오게 하니 그 이후로 천성산 주변에는 칡넝쿨이 잘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천성산 곳곳을 다녀 봤지만 실제로 천성산 주변에는 칡넝쿨이 거의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원효가 당나라에서 찾아온 1천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경을 강론할 때 식량이 부족했다. 1천명 제자들은 화엄경을 공부하라, 공양(供養)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에 수백 명씩 마을로 내려가 탁발을 해야 하는 등 대중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사는 양산지역 상북면에 거부(巨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탁발하러 갔다. 그 집 하인이 발우(승려의 밥그릇)에 쌀 한 되를 부으니 반의반도 못 찼다.  이상하게 여긴 하인은 다시 쌀 한 되를 부었으나 그대로 이었다. 하인이 이 사실을 주인에게 고하자 주인은 도사임을 깨닫고 1천명 제자의 식량을 해결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원효대사는 천성산 일대에서 당나라에서 온 천명의 제자들에게 먹고, 자는 것을 비롯하여 그들을 위해 화엄경을 열심히 강론하였다. 대사의 강론을 들은 천명의 제자들은 모두 화엄경에 담겨 있는 화엄 사상을 통달하게 되었고, 모두 성인(聖人)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성산(千聖山)은 천(千)-일천 천, 성(聖)-성스러울 성, 산(山)-뫼 산, 천명의 성스러운 사람이 배출되었다고 해서 붙이진 이름이다. 아울러 원효산은 원효대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한편 천성산 제1봉(920.17m)을 원효산(元曉山)으로 제2봉(852.2m, 비로봉)을 천성산(千聖山)으로 칭했다. 그러나 양산시에서 이 2개 산의 이름을 통합하여 천성산으로 변경하고, 기존의 원효산을 천성산 주봉(제1봉), 천성산을 제2봉으로 삼았다.  


* 참고자료 : 양산읍지/한국사찰전서

 * 30여년전 노전암 비구니 스님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임.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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