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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희영기행작가 Jun 05. 2023

[영남알프스 전설따라]천성산 적미굴

'동학 창시자'최제우 선생의 49일 기도수행처

천성산 정상인 비로봉 8부능선에 위치
붉은색 띤 눈썹형상의 바위 아래의 굴
생각보다 넓고 남동쪽 향해 열려있어
흐르는 석간수 넘치지 않고 수위 유지

천성산 적미굴 안에서 바라본 경관. 저 멀리 천성산 화엄벌이 보인다

천성산 적미굴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적미굴은 소위 천성산 중앙 능선이라 불리는 산 정상(비로봉) 8부 능선에 있다. 이 능선은 짚북재(옛날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1,000명의 대중을 천성산 화엄벌에서 화엄경을 강론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으기 위하여 짚으로 만든 북을 매달아 놓은 곳)와도 연결되는데 양산시 하북면지에 따르면 '이 골짜기(내원골) 산 정상 근처 바위 상단에 붉은색을 띤 눈썹 형태의 바위가 있어 적미(赤眉)골이라 하고, 그 바위굴을 적미굴(赤眉窟)로 불린다'고 적고 있다. 즉 붉을-적(赤), 눈썹-미(眉), 굴-굴(窟)인 셈이다. 이후 자연동굴인 적미굴(赤眉窟)을 적멸굴(寂滅窟)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숙한 내 집 부녀 이글 보고 안심하소 / 대저 생령 초목군생 사생재천 아닐런가 / 하물며 만물지간 유인이 최령일네 / 나도 또한 한울님께 명복 받아 출세하여 / 자시 지낸 일을 역력히 헤어보니 / 첩첩이 혐한 일을 당코 나니 고생일 네 / 이도 역시 천정이라 무가내라 할 길 없다.(이하 중략) 


동학의 교주 최제우가 지은 안심가(安心歌)의 한 대목이다. 안심가는 조선 철종 12년 (1861년)에 동학의 창시자 수은 최제우 선생이 지은 가사다. 2음보 1구로 총 290구로 되어있다. 이 안심가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불안해하던 부녀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지은 노래이다. 이 가사에서 최제우는 득도한 뒤 하늘에서 물형부(物形符·최제우가 영감을 받아 천신을 그린 천주교도의 영부)를 받아 이를 그린 종이를 먹고 신선과 같은 풍채와 골격을 갖추게 된 자신을 서학(西學)을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그 뒤 왜적에 대한 적개심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곧 왜적을 쓸어버리고 우리나라의 운수를 보전할 몸임을 밝히고, 따라서 부녀자들은 안심하라고 설득하고 있다. 특히, 이 가사에서 최제우는 천대받던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현숙하고 거룩하다고 떠받들면서, 춘삼월 호시절의 태평가를 함께 부를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 이 노래는 용담유사(龍潭遺詞)에 실려 있다. 

적미굴에서 바라본 천성산 화엄벌의 경관

# 을묘천서 받은 수운 최제우 선생의 입산기도처


최제우 선생의 수운문집에 따르면, 1856년(철종7년) 천성산(千聖山·811.5m)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다고 나와 있다. 1855년에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온 승려로부터 신인(神人)에게서 얻었다는 일명 을묘천서(乙卯天書)를 받고 본격적인 수도를 위한 탐구와 수련을 시작했다. 1856년(丙辰年) 봄에 스님으로부터 양산 천성산에 기도할만한 곳으로 내원암(內院庵)이 있다 하여 소개를 받았다. 4월(음력)에 폐백을 갖추어 납자(衲子·중의 별칭)의 안내로 내원암에 들어갔다. 49일간을 작정하고 기도를 시작하였으나 2일을 채우지 못한 47일만에 80세에 이른 숙부 섭(1777∼1856)이 별세했다는 부음을 받게 되었다. 하산하여 장례를 치른 후 1년간 상복을 입고 나서 1857년(丁巳年) 7월에 다시 천성산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자연동굴인 적멸굴에서 49일간의 기도를 마쳤다. 수운 최제우의 입산기도는 이 적멸굴 기도처가 마지막인 셈이었다. 이후에는 입산기도를 하지 않았으며 1859년 고향인 경주로 돌아가서는 용담정에서 기도하였다고 전해진다.

적미굴 내부의 경관

# 수도하기에 적당한 적미굴(赤眉窟) 


적미굴을 이루고 있는 바위는 높이가 13m가 훌쩍 넘어 보이며 산 중턱에 비스듬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바위 색깔은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띠고 있으며 멀리서 바라보면 굴 입구가 마치 눈썹 형상을 하고 있다. 굴 안은 생각보다 넓고 남동쪽을 향하여 열려 있다. 동쪽은 바위벽으로 가려져 있어 마치 벽 위에 거대한 천장바위가 비스듬히 얹힌 것 같은 형상이다. 천장은 산불의 흔적인지 아니면 취사의 흔적인지 검게 그을려 있다. 바닥은 원래 가운데가 깊이 팬 협곡 모양이었지만, 벽과 천장에서 떨어진 돌과 외부에서 운반된 흙으로 평평하게 매운 듯하다. 굴 안엔 맑은 석간수가 흐르는데 넘치지는 않고 항상 같은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높이는 입구 쪽 가장 높은 곳이 약 9m정도이고, 맨 안쪽은 엎드려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낮다.  바닥 한 모퉁이에는 수행자가 가져다 둔 듯한 방석 형태의 깔판이 몇 겹으로 쌓여있다. 굴 입구는 남동쪽을 향해 열려 있다. 한때는 누군가가 갖다 놓은 안심가를 적은 인쇄물이 놓여 있었다. 여름철에는 처마가 그늘을 만들고, 겨울에는 햇빛이 깊숙이 들어와 수도하기에는 적당한 장소로 보인다. 

적미굴이 있는 천성산(비로봉) 중앙능선 경관. 이 능선 아래 적미굴이 있다.

# 적멸굴에서 시천주(侍天主)사상을 생각했을까?


적미굴에서 기도를 마친 최제우는 처가가 있던 울산으로 거처를 옮겨 여시바윗골(중구 원유곡길 107)에 초가를 짓고 수련을 계속하다가 1859년 10월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가게 된다. 고향인 경주 구미산(龜尾山) 용담정에 정착한 후 세상을 구원할 도를 깨치지 못하면 세상에 다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의 '불출산외(不出山外)'이란 네 글자를 문 위에 써 붙이고 수련을 계속했다. 


1860년 봄을 맞은 최제우는 '도의 기운이 오래 있으니 사악함이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의 중인(衆人)과 함께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 즉 내가 이곳에서 제세안민(濟世安民)할 수 있는 새로운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산 밖에 나가지 않겠다. 모든 정성을 다하여 진리를 깨닫도록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표명한 입춘시(立春詩)를 지어 벽에 붙였다.  


이후 최제우는 천사문답(天師問答)이라 불리는 하늘님과의 교감을 통한 특별한 체험 끝에 1860년(철종11년)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 한다.


# 최제우는 누구인가?


수운 최제우는 조선후기 시천주(侍天主)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이다. 1824년(순조 24년)에 태어나 1864년(고종1년)에 사망했다. 몰락한 양반가 출신으로 세상인심이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천명을 돌보지 않아서임을 깨닫고 천명을 밝히기 위한 구도와 수련에 전력을 다했다. 1860년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이치를 체득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東學)


동학은 1860년 수운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 천도교의 모태이기도 하며, 조선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사대해왔던 중국이 서방인 영국에게 패한 것에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방 선교사를 통해 들어와 침략전쟁을 대표했던 기독교(서학) 그리고 사대주의적 문학인 유교(북학) 등 새로운 개혁의 학문의 필요성을 통해 한민족 교유의 신앙을 통한 정신적 결집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절실함 속에 사람 중심의 학문, 즉 서학과 반대되는 학문이라 하여 동학이라 하였다. 이렇듯 천성산은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천명의 대중에게 화엄경을 가리켜 성인으로 탄생시킨 성스러운 곳이며, 수운 최제우 선생이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일으키게 한 성스러운 곳임이 틀림이 없는 것 같다.


* 이글은 필자가 30여년전 내원사 익성암에 있던 한 비구니 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임.  ※참고문헌 : 용담유사 (도올 김용옥 著) / 양산읍지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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