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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희영기행작가 Nov 27. 2023

[영남알프스 전설따라] 문복산과 문복도사

삼국통일 이룬 신라 화랑정신 퍼져나온 곳

문복산에서 바라본 드린바위(이 바위 아래 동굴이 문복도사의 마지막 기도처로 알려졌있음) 

진흥왕 시기 운문사 중심 창건 오갑사
원광, 동쪽 가슬갑사서 세속오계 전승
602년 백제 상대 임전무퇴 실천 대승

40년 후 대야성전투 보름만 항복 수모
복수나선 김유신 따라 참전한 낭도 문복
인생무상 느껴 입산 도 닦으며 살아가


문복산(文福山)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과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영남 알프스산군 중 가장 낮은 막내격인 산이다. 문복산 서쪽에는 600년(진평왕 22)에 수나라에서 귀국한 원광이 창건한 가슬갑사 터가 있고, 개살피계곡 옆에 있다. 개살피계곡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계살피계곡'이라 표기돼 있고, 삼계리 사람들은 '게피계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살피'라는 말은 가슬갑사 옆의 계곡이라는 경상도의 방언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 세속오계 전수받은 귀산과 추항


신라 진흥왕(540∼576)때에 청도 운문사를 창건한 신승(神僧)이 지금의 운문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갑사를 지어 오갑사(五岬寺)를 창건했다고 한다. 중앙의 대작갑사(大鵲岬寺)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으로는 소작갑사(小鵲岬寺)와 북쪽에 소보갑사(所寶岬寺)를 지었다. 이 중 대작갑사는 지금의 운문사(雲門寺)고, 소작갑사는 현재 대비사(大悲寺)다. 그러나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한 정국 속에 오작갑사는 대부분 폐사됐고, 운문사와 대비사만 계승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슬갑사는 지금 운문사 동쪽 9,000보가량의 가서현 혹은 가슬현의 북쪽 골짜기에 있었다고 한다. 가슬갑사는 후삼국시대에 폐사됐으며 사찰에 있던 기둥들을 대작갑사(현 운문사)로 옮겼다. 가슬갑사의 폐사는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어떤 기록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 않다. 지리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더 가치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천문갑사, 가슬갑사를 비롯한 주변의 오갑사는 기도 도량이자 화랑의 군사훈련장으로 알려져 있다.

계살피계곡 입구에 세워진 세속오계 표지석

# 아막성전투 위기서 승리 이끌고 함께 전사


귀산(貴山)은 신라의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화랑 출신이었다. 그는 어릴 적에 같은 부 사람인 추항과는 친한 친구 사이였다. 하루는 두 사람이 서로 이르기를 "우리들이 꼭 사군자(士君子)와 더불어 놀아야 하겠으며 먼저 정심수신(正心修身)하지 않으면 아마 욕됨을 면치 못할지도 모르겠다. 어진이 곁에 나아가서 도(道)를 묻지 아니하려는가?" 하였다. 때는 수(隋)나라로 들어가 유학하고 있던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진평왕(眞平王) 22년(600)에 조빙사(朝聘使) 나마(奈麻·벼슬이름) 제문(諸文)과 대사(大舍·벼슬이름)를 따라 돌아와서 가실사(加悉寺 운문사 부근)에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의 높은 예우를 받고 있었다. 귀산 등이 그의 문하(門下)로 공손히 나아가 말하기를 "저희들 속사(俗士)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바가 없사오니 종신토록 계명(誡命)을 삼을 한 말씀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나이다"고 했다. 

개살피계곡에 있는 - 가슬갑사 유허비 

원광이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으니, 첫째, 사군이층(事君以忠·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일) 둘째, 사친이효(事親以孝·부모를 효도로 섬기는 일) 셋째, 교우이신(交友以信·벗을 신의(信義)로 사귀는 일) 넷째, 임전무퇴(臨戰無退·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일) 다섯째, 살생유택(殺生有擇·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했다. 


# 김춘추의 딸 고타소·사위 품석에 치욕 안긴 백제


귀산 등이 "반드시 행하여 감히 실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로부터 2년 뒤인 진평왕 24년(602) 8월 백제와의 아막성(阿莫城 전북 남원시 운봉읍)전투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귀산은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내가 일찍 스승에게 들으니 선비는 전쟁에 있어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날까 보냐" 하고 적에게 돌진해 적군 수십 명을 사살하고 신라군을 승리로 이끌게 하고 추항과 함께 전사해 세속오계를 몸소 실천했다고 전하고 있다. 

문복산 정상 표지석

642년 8월, 백제 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대야성(大耶城) 공격을 명했다. 대야성은 낙동강 서쪽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당시까지 백제가 장악하지 못한 낙동강 서안 일대에 남아 있던 신라군의 마지막 보루였다. 이곳 대야성이 전략적 요충지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경상남도 서부지역의 통치거점으로 삼은 이후였다. 대야성은 육십령과 팔령치를 통과해 소백산맥을 넘어 진입하는 백제군을 방어하면서 경상남도 서부지역을 통괄하는 신라의 군사 요충지였다.


윤충이 이끄는 백제군이 대야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개시하자 대야성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신라 장수는 김춘추의 사위이자 대야성 도독(都督)이었던 김품석(金品釋)이었다. 보름간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품석은 서라벌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어떡하더라도 버텨보려 했지만 이미 화살은 떨어지고, 내부 배신자의 배신으로 인해 가지고 있던 군량미도 모두 불탔다. 무엇보다 성주를 믿지 않는 성민들의 이반된 민심과 군사들의 저하된 사기야말로 자신이 저지른 큰 실책이었다. 

642년 8월, 백제 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대야성(大耶城) 공격을 명했다. 대야성은 낙동강 서쪽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당시까지 백제가 장악하지 못한 낙동강 서안 일대에 남아 있던 신라군의 마지막 보루였다. 이곳 대야성이 전략적 요충지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경상남도 서부지역의 통치거점으로 삼은 이후였다. 대야성은 육십령과 팔령치를 통과해 소백산맥을 넘어 진입하는 백제군을 방어하면서 경상남도 서부지역을 통괄하는 신라의 군사 요충지였다.

문복도사가 말년에 기도를 올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문복산 통천문

# 절치부심 신라에 멸망…요충지 획득 대가 혹독


자신도 살고 성민도 살기 위한 마지막 결심은 항복이었다. 하지만 백제의 장군 윤충은 김춘추의 딸 고타소(金古陀炤)와 사위인 품석을 살려줄 생각은 아예 없었다. 결국 품석은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결했고, 품석과 고타소의 머리를 백제로 가져가 감옥 바닥에 묻고 죄수들이 밟고 다니게 하는 수모를 겪도록 했다. 그녀의 시신은 나중에 김유신이 옥문곡 전투(647년)에서 사로잡은 8명의 백제 장군과 교환했는데, 이때 김유신을 따라 옥문곡 전투에 참전해 승전을 거뒀고, 시신을 수습할 때 참여한 낭도(郎徒·낭도의 신분이나 자격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수도 서라벌에 사는 6부민 출신 자제들로 주축을 이뤘다고 짐작함)중 한 사람이 문복(文福)이라는 설이 있다.


서라벌로 돌아온 문복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 전쟁에서 세속오계의 계율 중 하나인 임전무퇴의 계율 때문에 나이 어린 화랑들과 낭도들, 수 많은 백성들이 죽이고,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낭도시절 산천대천을 찾아다니면서 눈여겨 봐뒀던 개살피계곡의 가슬갑사로 출가를 한다. 낭도시절에 큰 가르침을 얻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문복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전쟁에 참가하면서 지어온 많은 잘못과 허물에 대해 참회하는 도(道)의 수련을 시작하게 됐다.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자 문복의 도는 높아만 갔다. 하루 한 끼에 콩 세 개를, 일주일에 죽 한 그릇을 먹어도 끄떡없을 정도로 그의 수련은 도인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 후 신라가 백제를 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고 그 뒤 아무도 문복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가 입산해서 사라진 산이었기에 사람들은 문복의 이름을 따라 문복산(文福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한국사강좌-고대편-(이기백·이기동 著 1982)

* 이글은 필자가 30여년전 상북면 덕현리 정실근(86) 어르신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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