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선사와 원효대사가 함께 걸었던 학심이계곡
상운산(上雲山)은 영남알프스의 주봉(主峰)인 가지산의 명성에 가려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마치 가지산의 전진봉(峰) 격 으로 취급받고 있다. 그러나 상운산은 해발 1,114m로 어엿한 산 이름을 가진, 영남알프스의 한축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골이 깊고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강원도 구봉산에서 이어지는 낙동정맥(洛東靜脈)이 영남권으로 진입해 경주 단석산을 지나 일자(一)로 길게 이어져 오다가 삼강봉과 백운산, 소호고개를 지나 마치 고헌산에서 용틀임을 하듯 솟구쳐 오른다. 고헌산에서 기세를 올린 지맥은 본격적으로 영남알프스에 진입한 뒤 언양의 진산(鎭山)이 된다. 이 지맥은 다시 외황재로 흘러 가면서 다소 숨 고르기를 한 뒤 운문령(630m)까지 이어지다가 서서히 고도를 높여 가며 상운산으로 이어지고 가지산에서 일망무제(一望無際)로 솟구치며 절정을 이룬다.
상운산은 학심이계곡과 생금비리계곡의 발원지이기도 하며, 상운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학심이계곡의 비룡폭포, 상운산 서·북능선의 용미폭포, 비선폭포를 일구어낸다. 또한 쌍두봉을 이루는 주봉(主峰)이기도 하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운문사에 기거할 당시 용미폭포를 바라보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올 만큼 신비로운 곳이기도 하다.
상운산 북쪽 쌍두봉 계곡에는 물줄기가 수직으로 떨어지며 20m 높이의 장관을 이루는 용미폭포가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운문사에 기거할 당시 용미폭포를 바라보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올 만큼 신비로운 곳이기도 하다.
# 구름 위의 산 '상운산'
상운산의 이름을 풀어보면 위상(上), 구름운(雲), 뫼산(山)이다. 즉 구름 위의 산이다. 상운산은 운문령에서 또는 석남사 일주문에서 귀바위능선을 따라 가지산에 오르는 중간지점에 있다. 운문령에서 쌀 바위로 이어지는 능선의 최고봉인 상운산은 평소에도 편서풍(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바람. 즉 학심이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탓인지는 몰라도 수시로 산 정상부는 구름으로 덮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운산 북쪽으로는 운문산 자연휴양림, 동쪽으로는 부처님의 귀를 닮았다는 귀바위와 남쪽으로는 석남사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산상(山上) 일출은 간절곶보다 상운산이 좀 더 빨리 해가 뜬다. 그래서 해돋이 명소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접근성 및 일출 광경이 아름답다.
# 일연선사와 원효대사가 함께 걸었던 학심이계곡
학심이계곡은 상운산과 쌀바위 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학심이골로 흘러들면서 10㎞ 이상의 협곡을 따라 흐른다. 학심이 좌골은 비룡폭포와 쌍폭, 학심이폭포를 담아내고, 큰 골과 합수되어 운문사 옆 이목소를 돌아 운문댐에 이른다. 학심이계곡은 그 옛날 학이 새끼를 치고 살았을 정도로 신비롭다. 산악인들이 학심이계곡을 영남알프스의 계곡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계곡, 골짜기 바위마다 검고 푸른빛을 간직하고 원시 자연 그대로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계류는 보석처럼 아름답고 신비롭다. 여기에다 웅장하면서도 신비감 넘치는 폭포는 마치 폭포의 세레나데(serenade)를 연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길을 고려 때 보양화상이 넘나들었고, 신라 때 원효대사와 일연선사도 머물렀다는 사실을 대작갑사(운문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 20여m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용미폭포
상운산 북쪽 쌍두봉 계곡에는 물줄기가 수직으로 떨어지며 20m 높이의 장관을 이루는 용미폭포가 있다. 이 폭포는 상운산과 헬기장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신원천으로 흘러들면서 용미폭포를 담아내고 삼계리를 거처 운문댐에 이른다. 여름 우기철을 제외하곤 평소 흐르는 물의 양이 적어 말라붙는 건폭(乾瀑)에 불과하지만, 겨울철에는 얼음이 두껍게 언 빙폭(氷瀑)은 바라만 보아도 그 장대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비하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폭포는 원래 깊은 소(沼)를 간직한 폭포로 20여m 상공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는 바라만 보아도 이상한 기운을 느낄 만큼 신비로운 폭포로 알려졌다고 한다.
폭포 아래 소에는 천년을 견디며 우둔하게 살아온 백룡(白龍) 한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용은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되었다. 늙은 백룡은 하늘로 승천하면서 힘에 겨운 나머지 바위에 걸쳐진 꼬리를 남긴 채 몸통만 승천하게 되어 걸쳐진 용꼬리가 폭포로 변했다 하여 용(용), 꼬리(미)를 따 용미폭포라 이름이 지었으며 승천하면서 온몸을 휘두르면서 주변의 바위들이 산산조각이 났고, 그 뒤 소가 막혀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면 한 가지의 소원은 꼭 이뤄준다는 전설이 함께 전해져 내려온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일연스님이 운문사 주지로 있을 무렵 용미폭포를 바라보고 삼국유사를 저술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보면 신비로움을 간직한 폭포임에는 분명한 모양이다.
# 삼국사기와 역사고서의 쌍벽을 이루는 삼국유사
일연(1206~1289)은 고려 무인 정권기인 1206년에 경상도 경산에서 아버지 김언필과 어머니 이 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9세 때 출가하여 14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의 대웅 장로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대구 비슬산에서 20여 년 동안 수행하고 전국 여러 사찰의 주지로 지냈다. 강화도 선원사, 포항의 오어사, 비슬산의 인흥사를 거쳐 72세인 1227년(충렬왕 3) 왕명을 받고 운문사 주지가 되어 1281년까지 지내면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일연이 승려로 활동하였던 시기는 몽골의 침입(1231)으로 나라 곳곳이 잿더미였다. 백성들은 도망을 가다가 굶어 죽거나 몽골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고려는 몽골과의 항전에 돌입하였지만, 일반 백성들의 삶은 고통스러워졌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원의 간섭으로 고려는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일연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 말년에 삼국유사를 펴내게 되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역사고서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신라·백제·고구려 세 나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조선과 기자 및 위만 조선을 비롯하여 가락 등의 사적, 신화·전설·시가(詩歌)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일연이 청도 운문사 주지와 용천사 주지로 있으면서 만년에 저술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하여 청도 지역의 삼국 시대에 대한 기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서술되어 있다.
# 귀바위 능선 따라 오르는 운치 남달라
산행은 울산과 경북 경계선에서 시작된다. 이른바 운문령이라 불리는 고갯마루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과 경상북도 청도군의 운문면이 인접하는 지점이다. 상운산으로 오르는 이 길은 방화로로 등산 초입부터 마칠 때까지 크게 힘들고 어려운 구간이 없다. 와불의 귀를 닮았다 해서 부르는 귀바위가 있는 능선을 따라 오르면 산행의 운치를 한껏 느낄 수 있다. 천천히 걸어도 왕복 3시간30분이면 갔다 올 수 있는 곳이다.
● 참고문헌
· 향토문화전자대전
· 이 이야기는 필자가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거주하고 있는 김말태(68) 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채록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