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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희영기행작가 Apr 09. 2024

[영남알프스 전설따라] 태봉산

조선 경숙옹주와 태봉산

삼국사기 최초 태실 기록 신라 김유신 고려 장태 풍습 조선 들어와 정착

50∼100m 높이 산 정상에 조성 주변 일정 구역 금표비 세우고 통제
태봉 주인 따라 출입금지 거리 달리해 관리까지 선발해 철저히 보호

성종 딸 태 묻힌 울산 유일 태봉산 연화산·무학산·문수산 줄기 보이고 좌우론 대곡천·작괘천 흘렀을 길지

울산과학기술대학교(UNIST)에서 바라본 태봉산 경관

조선시대 왕실에서 대통을 이을 왕손의 잉태는 중요한 일이다. 왕실에서 원자나 원손이 태어나면 그 태(胎)를 소중하게 다루고 태를 묻을 태봉(泰封)을 선정하여 출산 후 배출된 태를 일정한 장소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문화를 장태문화라 하며, 왕실의 번영과 왕실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많은 자손을 낳기를 바라는 염원의 뜻에서 전국에 풍수설(風水說)에 따라 명당(明堂)을 찾아 태실을 만들고 태를 묻었다. 

삼국사기 신라 김유신의 태실 기록이 가장 오래된 장태 기록으로 남아있다.

태실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시대 김유신의 태실이 가장 오래된 장태 기록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태실은 고려 태조 왕건 시기에도 태실이 조성되었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경남 밀양 귀령산에 태실을 조성한 고려 인종부터 태실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장태풍습을 이어받아 변화하고 발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세종대에 정앙(鄭秧)은 당나라 때 승려이자 천문학자였던 일행(一行)이 저술한 '육안태(六安胎)'를 다음과 같이 인용 하였다. "사람이 나는 시초에는 태로 인하여 자라게 되는 것이며, 더욱이 그 어질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함이 모두 태와 관계가 있다. 이런 까닭으로, 남자는 15세에 태를 간수하게 되나니, 이는 학문에 뜻을 두고 혼가(婚嫁)할 나이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을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흠앙(欽仰)을 받게 된다" 또한 조선 순조실록 22권 1819년(순조 19) 12월 10일 무술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약방 도제도 남공철(南公轍)이 아뢰기를 "국구의 전하는 바로 인하여 삼가 듣건대, 중궁전의 태후가 지금 여러 달째라 하니 산실을 기일 전에 미리 실천함은 곧 전례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산달을 맞이하여 산실청(産室廳·왕비나 왕세자빈을 위한 출산준비기관으로 출산 예정일 3개월 전 설치)을 설치하라" 하였다.

경숙옹주 태실 및 비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

# 태실 주인 왕 즉위하면 난간석·비석 새로 조성


태봉이란 계란형의 지표 높이 50∼100m 정도 되는 야산을 골라 정상에 태를 매장하고 아래에 재실(齋室)을 지은 공간이다. (태봉산은 해발 118m) 조선시대 왕실에서 태(胎)를 묻기에 좋은 장소로서는 높고 청결한 곳 가운데 둥그런 봉우리를 선호하였다. 그에 따라 왕실의 태실을 산의 정상에 조성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봉우리를 태봉이라 일컬었다. 태실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한 뒤 태실 주변에 난간석과 비석 등을 새로 조성하는 의식을 진행하는데, 이를 가봉(加封)이라 하였다. 또한, 태봉을 관리하기 위해 태봉지기를 선발하여 철저히 보호하게 하였다.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해당 백성을 엄격하게 처벌했을 뿐 아니라, 태봉관리를 소홀히 한 태봉지기와 지방관도 함께 벌하였다. 


# 태실지 금표 안 백성 가옥·밭 등 보상하고 철거


조선시대 초기에는 처음부터 왕자와 왕녀의 태를 묻어 태실을 조성하지 않았다. 세종대왕 대에 왕자에 한해 태실이 조성되다가 성종 때에 와서는 왕자뿐만 아니라 왕녀의 태실까지도 조성되기 시작하며 장태제도가 정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태실은 대부분 충청도와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 일부에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태실지의 선정을 위해 태실도감을 두었으며, 조선후기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주관하였고, 태실지가 선정이 되면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를 지방에 파견하였다. 왕실의 태실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태실주변의 일정한 거리를 출입통제 구역으로 설정하였다. 태봉은 누구의 것인가에 따라 몇 등급으로 나누었고, 등급에 따라 금지구역의 넓이도 달라졌다. 왕의 태봉은 1등급(원자와 원손)으로 300보(540m), 2등급(대군과 공주)으로 200보(360m), 왕자의 태봉은 3등급(왕자와 옹주)으로 100보(180m)로 정했다. 태봉으로 선정되면, 금표 안에 있던 집이나 밭들은 주인에게 보상을 한 뒤 철거하였다. 안태일이 정해지면 안태사가 태실지로 이동하여 태실이 조성되면 금표비(禁標碑)를 세워 태실 주위의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을 금지하였다. 태실의 역사를 마치면 관할 구역의 관원은 정기적으로 태실을 순찰해 이상 유무를 확인한 뒤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태실을 고의로 훼손했거나 벌목·채석·개간 등을 했을 경우에는 국법에 의해 엄벌하도록 정하였다.

경숙옹주 태실비원경.

# 안태용 도자기와 세태(洗胎)의식


조선 초기의 안태 용기는 항아리를 비롯하여 다양한 기종과 재질의 그릇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항아리 1개로만 사용하였다가, 외항아리와 내항아리로 나눠 사용하였다. 세종부터 세조까지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내·외항아리의 구성이 아닌, 내항아리 역할을 하는 분청사기 대접과 작은 분청사기 항아리가 있었고, 외항아리 역할을 하는 뚜껑 모양의 분청사기로 사용하는 등 과도기적 형태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성종 이후에 태항아리와 내항아리형태가 모두 백자로 만들어졌다. 아기씨가 탄생하면 태와 태반을 백자 항아리에 넣어 길한 방향에 안치한다. 3일 후 태를 씻는 세태의식을 거행하는데 이때 태를 물로 100번 씻고, 향온주로 다시 씻어 동전이 깔린 백자 내항아리에 넣고 홍색 끈으로 묶어 봉한다. 다시 백자 외항아리에 내항아리를 넣고 밀봉하여 홍색 끈으로 묶고 홍패를 달아 태의 주인을 알린다. 태 항아리는 태봉(胎峯)이 정해질 때까지 길한 방향에 안치한다.


성종과 숙의김씨 사이 다섯째 딸 경숙옹주 태실


태봉산은 조선시대 경숙옹주의 태실 및 비가 있었던 곳으로 울산에서 유일하다. 지금 이곳은 태실은 사라지고 태실비만이 남아있다. 경숙옹주 태실 및 비(敬淑翁主 胎室 및 碑)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산 112번지 태봉산에 있다. 2004년 12월 16일 울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울산과학기술대학교 입구 정문 오른편에 볼록하게 솟은 둥근 봉우리다. 산 아래 민가와 가까운 곳에는 경작지가 있어 논, 밭으로 사용되고, 조금 올라서면 산허리를 따라 많은 무덤들이 즐비하게 모셔져 있어 단번에 이곳이 예사로운 곳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국도 24호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좌측의 연화산, 무학산 줄기와 우측의 문수산, 그 아래로 태화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그리고 1965년 사연댐이 준공된 이후로 지금은 그 물길을 볼 수 없지만 당시 태봉산을 중심에 두고 우로 굽이쳐 흘러가던 대곡천과 작괘천의 물줄기를 연상할 수 있다. 하지만 500년 이상의 세월을 지나면서 사연댐 건설에 의해 물줄기가 막혀 흐르지 않는 계곡과 숲처럼 우거진 아파트군락지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나무 사이로 사연댐과 연화산과 무학산이 이어져오는 산 줄기.

# 1970년대 도굴됐다 되찾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숙옹주(敬淑翁主)는 1484년 성종(1457~1494)과 후궁 숙의김씨(淑儀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비 앞면에 왕녀합환아기씨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이라고 적혀 있으며, 뒷면에는 성화이십일년팔월초육일입(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이라고 적혀있다.(성화는 명나라 헌종(성화제)의 연호다) 기록으로 보아 1485년(성종 16)에 경숙옹주 출생 후 그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경숙옹주는 성종과 숙원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째 딸로 알려져 있다. 중전에게서 난 딸은 공주이고 후궁이 낳으면 옹주라 했다. 평안도 영유현령을 지낸 민종원(閔宗元)의 아들 민자방(閔子芳)과 혼인하여 아들 1명을 낳았다. 경숙옹주의 묘는 부천시 작동 산 57번지에 있다. 경숙옹주 태실은 1970년대 초 태실이 도굴되었으나 태항아리 2점과 태지(胎誌) 1점을 찾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이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당시 도굴꾼들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파헤쳐진 문화재를 생각하니 아쉬움을 감출 수 없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태항아리와 태지가 무사히 소장되고 있다니 다행인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 백성들은 왕실의 태실이 자기 지역에 오는 것을 큰 영예로 생각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실이 설치되는 지역은 왕실과의 일체감을 느끼며, 자기가 살고있는 지역이 좋은 길지임을 가슴에 담고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태봉산 아래 요소요소에는 이곳에서 자라서 삶의 터전을 이루며 살았던 많은 이들의 무덤들이 모셔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

                                                                                                   

 

<< 참고문헌 >>

· 향토문화전자대전

· 조선왕실의 태실의궤와 장태문화-윤신영

· 조선왕실의 안와 태실의궤-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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