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파트 / 늦은 밤 / 안방 불 꺼진 채]
시계를 보니 자정이 다 되어간다. 엄마는 와계시지만, 남편은 오늘도 회식.
아직 백일도 안 된 둘째는 이유 없이 울고, 첫째는 자꾸 잠에서 깬다.
나는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기저귀 갈고, 수유하고, 안고 재우기를 다섯 시간째 반복 중이다.
몸이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아서야, 제발 좀 자자… 너는 이제 그만 울고…”
그 순간, 온몸의 피로와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누구랑? 꼭 가야 하는 자리야?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웃음소리에) 적당히 하고 들어오라고!”
내 목소리는 이미 울음이 섞여 갈라져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문득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싶은 마음에 눈물이 났다.
남편은 회사에서 인정받고, 나는… 이 캄캄한 방에서 혼자 증명할 수 없는 육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문 열리는 소리 / 남편 귀가 후]
몇 분 뒤, 현관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섞은 술 냄새가 침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남편은 옷을 갈아입고 들어오더니 살짝 취한 목소리로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왜 이렇게 또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장모님 와계시니까 좀 여유 가져. 당신만 힘든 거 아니잖아.”
그 말에 나는 이성의 끈이 끓어졌다.
남편의 목소리에는 나의 고통을 '투정'으로 치부하는 듯한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여유? 당신 회식하는 시간에 애는 나 혼자 보는데 당신은 왜 우리 엄마까지 들먹여? 당신한테 미안해서 내가 얼마나 눈치 보는지 몰라?”
남편
“장모님 들으시겠다. 목소리 좀 낮춰. 힘들면 그만두던가! 그렇게 힘들면 애초에 애를 왜 둘이나 낳았어?”
남편의 입에서 '그만두던가'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심장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
“(목소리를 떨며) 그걸 말이라고 해? 이 애들이 우리 애가 아니고 내 애야?? 정신 차려, 이 사람이! 내 커리어 포기하고 당신 애 키우는 기분 들게 하지 마!”
숨이 막힐 듯했다. 문득 거울을 보니, 눈물과 땀에 젖은 채 벌겋게 상기된 얼굴.
“내가 진짜로... 여기 있는 게 맞나...?” 나는 이 방에 갇힌, 경력이 단절된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조용한 주방 / 다음날 아침 / 엄마와 대화]
엄마는 전날 밤의 싸움을 모르는 척, 아무 말 없이 미역국을 덜어주고 있었다.
나
“엄마… 어제 들었어? 애는 같이 낳았는데 나만 왜 이렇게 힘들고 억울한지 모르겠어…”
엄마
“…니 아빠도 그랬다. 회식 많고, 일 많고, 회사가 다였다. 그 시절엔 그리고 토요일까지 일했다이가. 너는 힘들다고 말이라도 하지. 나는 말도 못했다.”
“근데 아빠 친구들 전부 지금 어떻게 됐는 줄 아나.”
[회상 전환- 나사장 아저씨와 김성중 아저씨]
나
“니 나사장 아저씨는 기억나나? 그 양반은 결국 선생 와이프 퇴직연금까지 날려먹었단다.”
그 말에 나는 얼핏 기억이 났다. 아빠 친구들 모임에서 늘 재밌고 목소리가 컸던 그 아저씨.
엄마
“맨날 사업된다고, 이번엔 진짜라고. 공무원 와이프 돈으로 살면서 맨날 대박만 쫓다가 지금은 쪽박차고 와이프 퇴직연금까지 날려먹었단다….”
“보면 한탕주의로 사는 사람들은 가족도 늘 뒷전이었데이. 그 아저씨 취미는 또 낚시라서 외박도 종종 하셨던 거 같은데, 가족은 그냥 자기의 성공을 위한 발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
나
“근데 나사장 아저씨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지. 김성중 아저씨는 뭐 하셔 요즘? 그래도 그 집은 아들이라도 서울대 갔잖아.”
엄마
“그 아저씨는 진짜, 기러기로 10년 살더만 결국 혼자 남았지. 와이프한테도 이혼 당하고 서울대 간 아들도 결국 엄마랑 더 가깝고. 자식 교육이라는 핑계로 10년 도망쳤으니, 퇴직하니까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는 기라. 혼자 늙어가는 기지.”
나
“그래 애 크는 것도 못 보고 그게 뭐야. ATM기도 아니고..”
엄마
“근데 뭐 니네 아빠라고 딱히 다르진 않았데이. 난 니네 둘 키우는 거보다 공부하는 아빠 눈치보느라 더 힘들었다. 니 아빠는 '공부'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
나
“그치.. 아빠도 요즘이었으면 바로 이혼각이지.”
엄마
“옛날엔 남자들이 '돈'이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면죄부를 받았지만… 지금은 그랬다간 이혼이다, 진짜로.”
(혼잣말로) “이럴 줄 알았으면... 아니지. 아니야“
[현재 – 나레이션]
(내면 독백)
문득 회사일로 바쁘긴 하지만 아이들 교육에도 집안일에도 늘 '함께하려 노력하는' 남편이 고마웠다.
그 시절의 아빠들은 ‘바깥일만 하면 된다’고 믿었고, 그 옆의 엄마들은 ‘그래야 우리도 산다’고 참았다. 그때는 참는 것이 곧 가정의 생존 방식이었다.
내 친구 영자는 옛날 아빠의 기억 때문에 비혼까지 선언했다. 지금 내 삶이 혼란스럽고 힘들지만, 그렇다고 비혼이나 딩크가 정답일까? 나는 결국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 시절 엄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버티는 싸움을 하고 있다.
남편은 과거 아빠들처럼 완전히 등을 돌리진 않았지만, 가장 힘든 순간 나를 홀로 두고 '힘들면 그만두라'는 무심한 말 한마디를 던졌다.
어쩌면 시대가 바뀌어도, 함께 살기로 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짊어진 짐의 무게는 여자들에게 여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평범함의 대가'인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