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 여성임원이 된 딩크족 내 동기

by 코토리

정신없이 등원 전쟁을 치르고 있다. 첫째는 팬티만 입고 뛰어다니고, 둘째는 울음을 터뜨린다.

어린이집이라도 보내야 한숨 돌리고 밀린 집안일을 할 텐데.

회사 업무는 노력한 만큼 성과가 보이는데, 육아는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도무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옷 좀 입으라고, 밥 먹을 때 돌아다니지 마라고, 20분에는 옷 입고 출발한다. 5, 4, 3, 2, 1!!!”

정신없이 아이들을 챙기는데, 카톡 알람이 계속 울린다.


대학동기 해정이다.

대학 시절부터 늘 주목받던 친구. 눈에 띄는 외모, 명석한 머리, 시원한 성격까지.

졸업도 전에 대기업에 입사했고, 동기 중 가장 빠르게 승진한 최연소 여성 임원.

결혼 초반부터 딩크족임을 선언하며 완벽한 삶을 사는 듯 보이던 해정이, 오늘은 웬일로 먼저 연락이다.


[카페 / 점심시간 /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 한해정과의 점심]

해정을 마주 앉아보니, 내 옷차림이 괜히 부끄러워졌다.

셔츠는 애기 이유식 묻은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고, 머리는 질끈 묶은 채였다.

'아.. 나 지금 엄마로만 살아가고 있구나.'예전 회사에서 잘나가던 나의 모습이 그리웠다.

해정은 여전히 날카롭고 완벽하다. 임원으로 승진도 하고 오랜만에 간단히 점심을 먹기로 했다.

펜슬 스커트, 시계, 노트북, 발끝까지— 모든 게 정돈된 사람. 그런데 얼굴빛은… 어딘가 건조했다.


애리(나)

“와우! 한상무님~ 축하해! 내 친구가 벌써 상무라니- 고생했다야”

해정

“넌 애가 둘이라니! 하루하루 전쟁이겠다. 너도 고생이 많아”

애리

“전쟁보다 더하지. 첫째는 기저귀 뗀 줄 알았더니 오늘 아침에 갑자기 바지에 쉬하고, 둘째는 이유식을 얼굴에 던지고 난리였어. 너 만나는 게 얼마나 큰 이벤트인지 몰라.”

해정(작게 웃으며)

“난 한 명 키우는 것도 상상 못하겠어. 솔직히 말하면 너 존경해.”

애리(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너야말로 대단하지. 회사에서 그 위치 올라가려면 진짜 죽어라 뛰고 라인도 잘 타야 하잖아.

난 육아휴직 두 번째로 올해도 쉬어서 내년 진급 연차인데 누락 될 것 같아.”

(작게 한숨)

“난 요즘 밤엔 애들 재우다 같이 잠들어. 책 한 장 넘길 힘도 없어.

누가 나한테 대화 좀 걸어줬으면 좋겠어, 애 말고. ‘엄마, 응가’ 말고. 그건 그렇고 남편이랑은 요즘 어때?”

해정(살짝 표정 굳으며)

“그냥 각자 할 일 하고, 서로 터치하지 않고 살아.”

애리

“좋은 거 아냐? 애 없으니까, 신혼처럼.”

해정

(잠시 멈춘 뒤) “...거의 대화도 없어. 그냥…룸메이트 같아. 방은 같이 쓰는데, 말은 안 섞는 룸메이트.”

애리(놀라며)

“진짜? 싸운 것도 아니고?”

해정

“싸우려면 소통이라도 해야지. 어느 순간부터 말 안 하는 게 편해지더라고.

잠자리는… 뭐 벌써 몇 년 됐지. 섹스리스? 예전엔 남 얘긴 줄 알았거든.

처음엔 우리도 꽤 좋았어.

근데... 내가 워낙 일에 집중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둘 다 말수가 줄었더라.

요즘은 퇴근하고 들어와서도, 각자 폰만 들여다보는 게 일상이지.”

애리

“애가 없으니까 더 신혼처럼 잘 지낼 줄 알았는데.”

해정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아이가 없으니까 관계에 생긴 빈틈을 메울 무언가가 없더라.

여행? 맛집? 그게 한계가 있지.

처음엔 출퇴근 시간이 달라서 서로 방해하지 않으려고 각자 방 쓰는 날이 많아졌고, 그게 너무 익숙해졌어.”

애리

“…헉. 진짜?”

해정

“응. 결국엔 스킨십도 다 끊겼고.”

애리

“그럼 진짜 완전... 룸메이트다.”

해정

“맞아. 일은 잘 돼. 성과도 좋고, 이번 분기 실적 좋아서 상까지 탔고.

근데… 뭔가 이상해. 성공했는데, 안정적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의문도 들고.”

애리

“무슨 말이야… 이혼까지 생각한다는 거야?”

해정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막상 이혼이라는 것도 뭐 큰 사건이나 계기가 있어야 하더라.

20대 연애도 아니고, ‘저희 이제 안 맞아서 헤어지려구요.’ 이게 말처럼 쉽지 않잖아. 사람들 보기에도 이상하고.”

애리

“그럼 어떻게 하려고?”

해정 (조금 더 조심스럽게)

“그냥… 요즘 내가 좀 이래저래 흔들려. 지난달에 옆 팀 팀장이랑 해외 출장 갔는데… 그때 진짜 거의 선 넘을 뻔했어.”

애리 (놀라서)

“아… 해정아…”

해정

“그냥 일 끝나고 호텔 라운지에서 같이 한잔하다 분위기가 좀 묘해졌거든.

사실 솔직히 좀 흔들렸지. 둘이 앉아서 얘기하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이 사람한텐 내가 여자구나' 같은 느낌 있잖아. 오랜만에 그런 기분이었어.”

애리 (긴장하며)

“그래서?”

해정

“그래서… 딱 거기까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내가 먼저 들어갔지. 근데 방에 혼자 앉아서 진짜 이상했어.

그냥 서럽기도 하고, 화도 나고… 울었어, 혼자. 결혼생활에서 내가 뭘 놓치고 살았나 싶어서.”

애리 (침묵하다 작게 말하며)

“너도 외로웠구나…”

해정 (쓴웃음)

“누가 보면 웃기겠지. 회사에선 성과 내고 최연소 임원으로 올라왔는데, 집에 돌아가면 나도 결국 혼자야.

남편이랑 같이 있어도 외롭고. 넌 남편이랑 잘 지내?”

애리

“나도 그래. 너 보면 되게 부러웠거든. 애 없으니까 얼마나 자유로울까 싶었는데.

우리..우린 좀 거리를 두고 싶은 지경이야.

원래 결혼 준비할 때도 한번 안 싸울 정도로 잘 맞고 잘 지낸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애 나오니까 너무 부딪히고 힘드네.”

해정(놀라는 표정으로)

“그래? 의외다. 너네 부부는 애칭도 부르고 존댓말도 쓰고 여전히 잘 해나갈 줄 알았어.”

애리

“하… 잘하고 싶은데, 진짜 어렵더라. 연애할 땐 안 보이던 게 애 키우니까 확 드러나. 남편이랑 기준이 너무 달라.”

해정

“예를 들면?”

애리

“나는 그냥 애가 아직 어려서 괜찮다 싶은데, 남편은 그걸 예의 없다고 무섭게 혼내.

애 앞에선 말 못 하고 뒤에서 싸우고… 남편은 또 내가 너무 유하게 키운다 하고.

이해도 안 가고, 결도 안 맞고. 어제도 결국 소리 지르며 싸웠어.”

해정

“성격 차이로 그런 갈등도 있구나. 나는 네가 애들이랑 시끌벅적하게 사는 게 가끔 부럽기도 했는데…

우린 반대로 살아왔는데, 결국은 비슷하게 외롭네.왜 이 삶이 완성형이 아닌 것 같지.”

애리

“..나도 그래. 각자 뭘 선택해도 결국 어딘가에 결핍이 있나 봐.

남들은 애 키우는 게 축복이라는데, 나는 매일이 생존이고 전쟁 같아.

밤마다 내가 점점 투명 인간 되는 기분이야. 남편은 회사에서라도 인정받는데, 나는 애랑 같이 젖은 수건처럼 축축 늘어지고.”

해정

“결국… 우리 둘 다 어디선가 외롭네.”

애리

“그치. 서로 다른 길인데, 가다 보니 비슷한 허전함에 도착했나 봐.”

해정

“근데 나, 애 하나쯤 있었으면… 어땠을까 자주 상상해.

진짜 무모하게 하나 낳아볼까 싶다가도, 벌써 이렇게 늦은 것 같기도 하고…”

애리

“나는 애 안 낳았으면…적어도 머리 말릴 시간은 있었겠다.”

(둘 다 동시에 웃음)

[폰 진동 / 해정 – 부사장 호출]

해정

(폰 보며 표정 굳는다)

“아, 부사장이네. 나 먼저 올라가 봐야 할 것 같다. 진짜 미안해. 먼저 보자고 해놓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간다.”

애리

“괜찮아. 다음엔 내가 육아 없는 날로 잡을게.”

해정

(일어서며)

“그래. 꼭 보자. 야… 가끔 나도, 지금 내가 뭐 놓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애리

“…우리 둘 다 그런 생각하는 거 보니까 뭔가 놓치긴 한 거겠지.”


[해정 퇴장 / 애리 독백]

나는 해정이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은 결국, 어디에서든 외로움을 피할 수 없나 보다.

애가 있어도, 없어도 성과가 있든, 없든 결국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고립돼가는 중.

우리는 서로 다른 길로 달려왔지만, 결국 비슷한 허전함 앞에 마주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허애리 내면 독백]

해정은 모든 선택을 계산적으로 했다. 결혼도, 아이를 갖지 않은 것도 모두 다.

완벽한 조합을 만들어놓은 해정의 삶도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득 생각한다. 인생에 완벽한 답 같은 건 없다고.

해정은 혼자 TV를 보며 잠들고, 나는 아이를 재우다 잠들지만 결국 밤이 오면 우리는 모두 어딘가 비슷한 외로움을 안고 잠든다.

그 순간, 집에 도착했을 때 첫째가 현관문을 열고 말했다.

“엄마! 어디 갔었어? 나 기다렸잖아.”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누군가 나를 기다려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갑자기 나의 하루가 의미 있어진다.


[해정의 메시지]

집에 도착해보니, 해정이가 문자를 남겼다.

“오늘 급히 가서 미안. 애리야, 나 오늘 너 보니까 애들하고 정신없는 네 삶이 부럽더라. 다음에 또 만나자.”


[나레이션 마무리]

아이 때문에 내 삶은 없어진다고 생각한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부러울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서로가 부러워하는 각자의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애 둘을 키우는 나의 삶이든, 잘나가는 여성 임원 해정의 삶이든.

어쩌면 우리가 인생에서 놓친 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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