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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연 Feb 05. 2023

의도적으로 기대를 배신했지만...

<유령>을 보고 하이퍼팝과 엔믹스를 떠올렸다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유령>은 인물들을 호텔에 감금시킨 후 조선총독을 암살하려고 한 항일조직 흑색단에 소속된 스파이, '유령'을 색출하려는 추리극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영화는 총독부 통신과에서 일하는 박차경(이하늬)를 유령이라고 미리 공개한다. 그러니 사실상 추리극이 아닌, 주인공의 신분이 탄로날 순간에 서스펜스를 발휘하는 심리 스릴러에 가까워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중반부부터 장르가 급변한다. 모종의 비밀이 밝혀지고나서부터는 명확한 적을 내세우고 이를 향해 복수하는 액션 활극이 된다.




고전적인 추리극일 줄 알았으나...


  이 영화에서 다양한 영화적 레퍼런스를 발견하는건 어렵지 않다. 이해영 감독의 전작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의 장르전환,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황혼에서 새벽까지>, 쿠엔틴 타란티노의 기관총 난사 씬, 실제로 1933년에 경성 극장에 걸렸던 <드라큘라>와 <상하이 익스프레스> 가 그렇다. 미쟝센이 돋보이는 편집은 과시적이고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각자의 역할에 맞게 격앙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름값을 하는 것처럼 그 의도와 목표가 희끄무레 하다.


크  레딧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서 떠올랐던 생각은 영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는 하이퍼팝과 엔믹스였다. 미래지향적 사운드를 빚는 하이퍼팝의 장르적 특성 때문이 아니다. 하이퍼팝이 실체를 구현하는데 있어 전통적인 방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 그리고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매니아의 장르로 비치는 특성들이 이 영화에서도 느껴졌다.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실제 사건이나 인물들을 끌어들여 역사적 고증을 반드시 챙기려고 했지만 <유령>은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는 친일파들을 단죄하겠다는 정형화된 목표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시대의 분위기, 그러니까 외부세력으로부터 억압받고 소중한 존재를 빼앗기는 자들의 한(恨)을 액션 활극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에 호텔 인테리어의 고증이나 히어로물에 버금가는 액션의 사실성 여부는 그리 중요치 않았을 것이다.




하이퍼팝은 실제 악기를 활용하지 않고도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영화는 추리극의 외피를 쓴 심리스릴러였지만 중반부터 장르를 급선회한다. 여기에서 각본의 코너링은 둔탁하다 못해 거칠어서 이후 영화는 시종일관 덜컹거린다. 역할이 불분명해 보였던 미쟝센은 이미지 과잉으로 그쳐버렸고, 그 의도가 어쨌든 형식적으로 쌓아올린 알리바이는 영화가 액션물로 방향을 틀어버린 후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영화는 장르전복에서 일련의 쾌감을 선사하고자 한 것 같지만 이러한 선택은 그리 유효해 보이진 않는다.


  <유령>의 선택은 자신의 음악적 색깔이 믹스팝이라고 선포하고 데뷔한 아이돌 엔믹스의 실패한 전략 같다. 데뷔곡 'O.O'로 성공유무를 쉽게 판가름할 수 없었던 엔믹스는 두 번째 싱글 'Dice'에서 그들의 전략이 실패했음을 증명했다. 장르음악을 이어붙여 하나의 곡으로 만드는 믹스팝은 새 음악이 필요한 시대의 요구에 도전해 볼 만한 선택이었겠지만, 다소 이질적인 두 곡을 이어붙이는건 쉽지 않은 일이고, 그 결과물이 사람들의 요구에 들어맞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유령>의 장르전환은 특정 장르물을 기대했던 관객을 배신하는 선택이다. 그 배신으로부터 뛰어난 영화적 성취를 이루거나 관객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장르적 쾌감을 선사할 수 있었다면 훌륭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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