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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연 Mar 16. 2023

상처는 절대 치유되지 않는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위로에 진정성이 느껴지는 이유

  2011년 3월 11일은 일본 국민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커다란 상흔이 새겨진 날이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본 지역 일부분은 지진으로부터 발생한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했다. 일본에게 3월 11일은 새까맣게 칠해서 없었던 일로 여기고 싶은 비극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너의 이름은.>에서 동일본 대지진을 운석으로 은유하여 애니메이션 속에서나마 사람들을 구하는 기적을 상상했고 <날씨의 아이>에서는 재난 이후 바뀌어버린 사회에서 서브컬처 장르인 ‘세카이계’(개인의 운명이 세계의 운명으로 귀결하는 장르)를 활용하여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재난 이후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것을 촉구했다. 두 작품은 재난 이후의 변화된 일본 사회에 대한 신카이 마코토의 격려와 조언이었지만, 환상을 위시한 위로는 공허함만 가져다 줄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변화한 사회를 맞이할 청년세대에게 ‘그저 괜찮을 것이다’라는 응원만을 제시하며 ‘체념적인 응원을 하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받기도 했다. 이에 신카이 마코토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재난 3부작의 마지막이라 명명하면서 ‘보다 국민에게 다가서는 작품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의 '문'은 여러가지를 상징한다.



  영화 속 미미즈는 대놓고 지진을 직유한다. 미미즈가 발생하는 문은 과거에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폐허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일본 지역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문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로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교두보이기도 하다. 문을 박차고 나오는 미미즈는 지진의 전조증상인 동시에 과거의 재난을 떠오르게 만드는, 일본 전역에 뻗쳐 있는 시대적 트라우마다. 신카이 마코토는 미미즈를 동일본 대지진과 연결시켜 이것을 일본 전역에 뻗어있는 불가해한 공포로 상징한다. 여기에서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처럼 기적을 바라지 않고, <날씨의 아이>처럼 마냥 체념하지도 않는다. 작품에서 묘사된 일본인들은 지진경보가 울려도 덤덤하게 스마트폰을 응시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일본 전역에 발생하는 지진은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해한 재해이지만, 그것과 함께 공존해야 하는게 일본인들의 숙명이다. 2011년의 비극은 언제든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 도쿄를 덮칠 수도, 혹은 또다른 일본의 대도시를 덮쳐 그들의 삶을 위협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여전히 황량한 동일본 지역의 폐허처럼 남겨질 것이다. 누구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려고 하듯이.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을 완벽하게 막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가 앞선 자신의 두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결과적으로 실패했음을 인정하면서, 두 작품의 문제점을 수정하고 싶어하는 자기고백처럼 보인다. 2011년은 일본에게 있어 완전히 치유될 수 없는 시대의 상흔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소재로 기적을 상상해 보았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고(<너의 이름은.>) 재난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향해 세카이계의 자폐적 특성을 끌어다가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고 자기최면을 걸 수 없다.(<날씨의 아이>) 

  여기서 신카이 마코토는 미미즈를 막는 토지시를 등장시켜 일본의 전통신에게 기도하며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새겨듣는다. 토지시는 히어로물의 문법에 들어맞는 인물이다. 허나 토지시는 재난을 방지할 뿐 시대적 상흔까지 치유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니 살아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건 3월 11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자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것 뿐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이제는 사라져버린 터전으로 돌아갔듯이 <스즈메의 문단속> 또한 폐허를 응시한다. 대지진의 아픔은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과거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국민에게 다가서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인터뷰를 한 신카이 마코토는 비록 그 위로가 치유로 귀결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아픔을 영원히 품고 살아갈 사람들을 위로한다. 과거에 붙들린 사람들에게 미래를 위해 살아가자는 말은 역설적으로 위로가 없으면 내일을 상상할 수조차 없을만큼 아픔이 크다는 것과 같다. 이 솔직함이 애니메이션의 진심을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오래 살고 싶어한다는 말,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뻔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사람들이 품고 있는 삶의 욕망이기도 하다. 상처를 꿰맬 수 없음에도 할 수 있다는 모순적인 그 믿음은 언제든 죽음이 닥칠 수 있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위안이 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모순을 이해하고 있는 어른이 할 수 있는 진심어린 위령제이자, 남겨진 사람들에게 내일을 살아가 보자는 조심스러운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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