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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연 Jul 17. 2023

팝아트 세계에서 펑크를 외치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반항적 태도의 기원

  그동안 MCU가 멀티버스를 다루던 방식을 짚어보자. 엔드게임 이후 마블스튜디오는 본격적으로 멀티버스를 도입했다. 방대한 세계관,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할거라 예상했던 관객들의 기대와는 달리 멀티버스는 많은 캐릭터들을 나열에 가까운 방식으로 등장시켰고, 어려운 상황을 타계하는 만능열쇠로만 기능했다. 멀티버스 때문에 설정놀음에 그쳐버린 것이다. 이는 코믹스 팬들조차도 마블스튜디오가 멀티버스를 활용하는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2018년에 개봉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줄여서 뉴스파)는 가히 충격이었다. 현재 애니메이션은 크게 셀 애니메이팅과 CG 애니메이팅으로 나뉜다. 아니메 강국인 일본이 주로 셀 애니메이팅에 방점을 두었다면, 디즈니와 픽사를 위시한 미국은 CG 애니메이팅을 활용한다. <뉴스파>는 이 두 가지 양식을 완벽히 포개어놓는다. 캐릭터의 외적 특성과 심리를 깊이있게 표현할 수 있는 셀 애니메이팅의 장점, 실제 영화의 연출방식을 이용할 수 있는 CG 애니메이팅의 장점을 적재적소에 혼용했다. <뉴스파>는 21세기 애니메이션계의 게임체인저였다. 단순히 애니메이팅 양식의 혁명 뿐만 아니라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야기에 반영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모범사례이기도 했다. 멀티버스는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이야기를 위한 부속품이라는걸 확실히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양식을 선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1편.



  전편이 스크린에 코믹스적 요소를 이식하는 방법론을 내세웠다면, 속편은 이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여기에 이번 작품의 진짜 주인공이기도 한 그웬의 감정을 색감만으로 묘사하며 새로운 볼거리도 선사한다. 스파이더맨의 딜레마와 더불어 친구와의 필연적 헤어짐에 외톨이가 된 그웬의 세계는 우중충하다. 밴드에 들어갔지만 합주보단 독주에 집중하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세계를 벗어났다. 우울함을 대변하는 파랑색으로 채워진 그웬의 세계는 후반부에 들어서야 달라진다. 많은걸 포기하면서 딸을 이해하려는 아버지를 끌어안는 그웬의 세계는 점차 따뜻한 색감이 번진다. 전작에 이어 속편에서도 새로운 시각미를 제공한 것이다.




색감으로 인물의 감정을 시각화한 연출.


  이 작품은 한마디로 '팝아트 세계에서 펑크를 흡수하는 스파이더맨'이라고 말하고 싶다. 초반부에 그웬과 대결하는 르네상스 벌처는 미술관에 놓인 제프 쿤스의 '풍선개'를 보고 코웃음 친다. 저것도 예술이냐고. 그웬은 답한다. 권위가 예술을 정하기는 하지만, 저런 것도 예술이 맞다고. 그웬의 답변이야말로 이 작품의 정체성이다. 고전예술은 오리지널리티를 중시한다. 이는 예술의 고유함을 수호하기도 하지만, 그 고유함이 소수의 전유물이 될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며 예술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이에 반기를 든 여러 작가들의 '팝 아트'로 예술의 엘리티시즘을 공격했고, 소수의 전유물로 빠질 뻔한 예술을 대중에게 전파했다. 앤디 워홀이 작품을 대량생산한 것처럼, 이 작품은 멀티버스라는 도구를 통해 코믹스에 등장했던 수많은 스파이더맨들을 대량으로 그려냈다. 누구나 예술을 즐길 수 있다는 팝아트의 태도는 '누구나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는 <뉴스파>의 주제와 일맥상통하다. 




외형은 변주를 주어도 스파이더맨은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처럼 대량으로 이미지화되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팝아트로 구성된 세계에 스파이더맨의 평생의 딜레마를 '트롤리 딜레마'로 엮어 스파이더맨의 숙명을 다시 한 번 꺼내든다. 그리고 질문한다.


'너(스파이더맨)의 좌절과 다수(시민 혹은 세계의 질서)의 생존 중 어느걸 택할 것인가.'


  이러한 딜레마는 줄곧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대다수의 스파이더맨들은 '자신을 희생시켜 다수를 구하는 결과'를 선택해왔다. 하지만 마일스는 이런 선택을 거부한다. 스파이더맨의 세계가 강요하는 선택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3의 답을 꺼내든 것이다. 이는 기존 시스템을 향한 반발이자 운명론적 세계관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의지로 행동하겠다는 선언이다. 흥미롭게도 마일스의 행동은 1970년대 펑크문화의 기조와 일치한다. 펑크는 '정신없고 반항적'이다. 2시간 넘게 만화경을 돌려보는 것 같은 시각효과로 꽉 찬 이 작품은 마일스 모랄레스를 현대예술의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뱅크시'처럼 내세우며 기존 세계의 규율에 반기를 든다.(우연히도 뱅크시와 마일스 모두 그래피티를 행한다. 공교롭게도 그래피티는 다수의 국가에서는 '불법'이다.) 운명을 가만히 앉아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마일스는 세계를 어지럽히는 테러리스트처럼 보이겠지만, 존재 자체가 '변칙점'인 그는 스스로 행동함으로서 세계의 변칙점이 되려는 혁명가일 수도 있다.



미겔이 주장하는 '스파이더버스의 규율'에 반항하는 마일즈는 현대예술의 테러리스트 '뱅크시'와 흡사하다.






  '스파이더 펑크' 호비의 조언을 받은 마일스는 이제 팝아트의 세계에서 펑크의 정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은 무엇을 희생시킬 것인지 고민하는게 아니라, 어떠한 일이 닥칠지라도 기차를 반드시 멈추겠다는 '선의'라는걸 증명하기 위해 나아간다. 멀티버스를 이렇게까지 다룬 작품이 있었을까. 가히 혁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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