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생 할아버지와 월세 보고서
구옥 다가구 주택.
재개발 예정 구역의 오래된 월세집이다.
보증금은 크지 않고, 월세도 요즘 시세로 보면 낮은 편이다.
한때는 이 건물에도 집집마다 불이 다 들어왔을 것 같다.
계량기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걸 보면, 예전에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소리가 꽤나 분주했을 것 같다.
지금은 재개발 구역으로 묶인 동네다.
집이 낡은 만큼 세입자도 하나둘 떠났고, 골목도 예전만큼은 시끄럽지 않다.
우리 집 집주인 할아버지는 35년생이다.
연세가 많으셔서 귀가 잘 안 들리지만, 경우 밝으시고 말투도 늘 다정하다.
한 문장을 말씀하셔도 앞뒤 맥락이 분명해서,
젊으셨을 때는 꽤 총명하신 분이었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 집의 주계약자는 내가 아니라 다온이다.
월말 즈음이면 어느 날,
현관문에 작은 메모지가 하나 붙어 있다.
○○월
수도 ○○원
전기 ○○원
할아버지가 직접 고지서를 확인하고 적어놓은 그 달의 공과금이다.
가끔 특이사항이 있을 땐 숫자 아래에 짧게 한 줄이 더 붙는다.
이 집의 수도 계량기는 여러 가구가 함께 쓴다.
거주 중인 사람 수대로 1/n 해서 나눠 내는 구조다.
전기는 같은 1층 세입자끼리 묶여 돌아가는 계량기를 쓴다.
그래서 전기세도 1층 사람들끼리 1/n이다.
수도는 그렇다 치고, 전기세에는 불만이 많다.
처음 이사 들어왔을 때 계량기가 많은 걸 보고도
“당연히 세대별로 나오겠지”라고 넘겼다.
그전까지 살아온 집들에선 전기 계량기가 세입자 명의로 되어 있었으니까.
여긴 세대분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처음 이사할 때 체크를 했어야 하는데, 그냥 넘어간 내 불찰이다.
어쨌든 그렇게 나온 공과금을 더하면,
그게 그 달 우리가 내야 하는 집값이다.
월세와 공과금은 온전히 다온이의 몫이다.
자동이체도 아니다.
매달 말일, 월세 입금일이 되면
다온이는 퇴근하고 돌아와 곧바로 집주인 할아버지 계좌로
월세와 공과금을 직접 이체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내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거의 빠지지 않고 이렇게 보고를 한다.
“엄마, 오늘도 월세랑 공과금 할아버지께 입금해 드렸어.”
나는 늘 비슷한 말로 답한다.
“응, 그래. 수고했다. 고마워.”
입으로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마음 한쪽에서는 늘 비슷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올라온다.
기특함.
미안함.
고마움.
그리고 조금의 안쓰러움.
그 네 가지가 뒤섞이면,
결국 마지막에는 한숨이 하나 나온다.
이 장면을 우리는 2022년 3월에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지금까지 반복하고 있다.
딱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제 더 이상,
이 미안함과 고마움과 안쓰러움을
그냥 계속 느끼며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
예민한 위장을 달래 가며 집밥을 챙겨 먹고,
출근하고, 퇴근하면 다시 같은 집으로 돌아오는 삶.
그 일상 자체는 나쁘지 않다.
낡았지만 익숙한 집,
계단을 내려와 대문을 열고
10분 정도 걸어가면 보이는 전철역,
어느 정도 몸이 적응해버린 생활 동선.
문제는 이 삶이 아니라,
이 집값을 내는 방식이었다.
매달 말일이 되면
다온이가 자신의 월급에서 월세와 공과금을 빼서 이체하고,
나는 “수고했다, 고맙다”라고 말하고,
그리고 둘 다 조용히 다음 달을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우리 둘 다, 너무 오래 서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월세는 요즘 시세로 보면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다” 쪽에 속할 거다.
하지만 내 삶의 한가운데에서 보면,
이 돈은 매달 같은 자리를 파고 들어와
우리의 미래를 조금씩 깎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몇 년을 더 버티면,
남는 건 뭐지?
어느 날,
다온이가 평소처럼 말일 보고를 마친 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리게 “수고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밤.
결국 나는 계산기를 켰다.
매달 나가는 월세와 공과금을 12달 치로 잡고,
앞으로 이 집에서 살게 될 것 같은 연수를
대충 곱해 봤다.
결과는 거창하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 숫자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마음속에서 딱 한 줄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이제, 전세를 알아볼 때가 된 걸까.”
그날 이후로
내 검색창에는 ‘전세’, ‘보증금’, ‘전세대출’,
그리고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진지하게 쳐 본 적 없던 단어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 집 이야기는,
그날 밤 계산기를 켰을 때부터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