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은 Sep 07. 2022

쌍봉사 일기 7/20(수):방을 옮기다, 운과 결과

<행운에 속지 마라>, 일상, 계속 나를 되돌아보다

1

절 생활의 좋은 소식

어제 점심시간에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팀장님이 다른 분들과 같이 앉으셔서 나를 부르셨다. 템플스테이 지내시는 분들 중 매일 같이 다니시는 여자 두 분 중 한 분이 다음날인 오늘 나간다고 하셨다. 다음날 나가시면 그 방으로 내가 옮겨가서 지내면 된다고 하셨다. 며칠 전에 팀장님이 나한테 20일에 방을 옮겨주신다 하셨는데 그것이 오늘인 것이다. 그간 화장실과 샤워실도 없이 혼자 동떨어져 지냈는데, 드디어 방을 옮기는 것이다. 다른 방들은 에어컨도 있다는 사실을 이때 얘길 들으며 처음으로 알았다. 이렇게 얘길 듣다가 문득 생각이 든 게, 얼마 전 차담을 하며 두 분이 나에게 외식하러 차를 좀 태워달라 부탁하듯 가볍게 얘기했는데, 그때 내가 조금 꺼리듯 대답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방에 돌아와 있으니 스님께서 차담을 하자고 부르셨다. 다른 분들이 아직 식사를 하시는 듯하여 기다리다 그 학생이신 남자분이 지나가시는 걸 보았다. 그분이 식사하러 가실 때 내 방 주변을 지나야 하기에 식사하러 가시나 여쭈면서 차담을 하러 가게 식사 끝내시고 내 방으로 오시라 했다. 그렇게 기다려 같이 올라갔더니 이미 여자분 두 분은 앉아서 계셨다. 아마 그 여자분이 오늘 나가신다고 차담을 하게 된 듯하다. 언제나처럼 스님께서 커피를 내려주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셨다. 오늘은 수행에 관한 말씀을 여럿 해 주셨는데, 신비주의적 체험들에 대한 얘기도 하셔서 조금 공감가지 않는 대목들이 많았다. 마침 대화를 하다가 그 외식 부탁했던 얘기가 나오고, 내일 나가니 외식은 못하더라도 한 번만 마트까지 태워주시면 안 되냐 부탁해서 흔쾌히 승낙했다. 나도 한 번씩 마트 주변의 카페도 가기에 편하게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렇게 조금 더 얘기하다 끝나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서 책을 조금 보고 있으니 그 두 분이 오셔서 지금 갈 수 있냐 부탁하셔서 가자했다. 그렇게 같이 있던 남자 학생 분도 부르고 넷이서 마트로 갔다. 두 분이 나한테 고맙다며 뭐라도 좀 사드린다 하셨다. 맥주 얘기를 하시길래 내가 깜짝 놀라니 두 사람이 절에서 매우 가깝게 지냈는데, 한 사람이 먼저 나가니 밤에 둘이 무조건 맥주를 마실 거라 하셨다. 나는 괜찮다 하고 굳이 다른 거 안 사주셔도 된다 하는데 굳이 사주신다 하셨다. 일단 출발해서 마트에 도착해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이것저것 많이 고르고 샀다. 나는 둘러보다 빵이랑 커피가 먹고 싶어 사니까 그분들이 그냥 계산한다고 가져가셨다. 그렇게 둘러보다 습기제거제가 보였다. 방바닥에 그냥 쌓아뒀던 책들이 쭈글쭈글해진 게 생각나 습기제거제를 사서 마트에 쌓여있는 박스와 함께 챙겨 차에 실었다. 그 후 계산들을 끝내고 절로 돌아왔다.


다들 팀장님께는 따로 말씀드리지도 않았고, 심지어 여자 두 분은 맥주까지 샀기에 팀장님에게 안 들키기 위해 조용히 방들로 돌아갔다. 이렇게 처음으로(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 외출이 끝났다.




2

느슨해진 마음가짐

최근 들어 조금 느슨해졌다. 며칠 전 일기에도 썼듯이 휴대폰 기능이 일부 가능해져 한 두 번 사용했더니 사회에서의 원래 생활리듬도 조금 되살아났다. 여기 처음 왔던 때부터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던 긴장이 느슨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명상도 거의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조금씩 늦어졌으며, 일기 쓰는 일도 소홀해졌다.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는 데에만 쓰고 있다. 책 읽는 것이 이 절에서 할 수 있는 행위들 중 그나마 가장 의욕적으로 행할 수 있는 가시적 목표가 있는 행위이기에 책에만 계속 집중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다 보니 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배우고 생각하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어서 한 권 한 권 끝내 간다는 사실 자체가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조금만 내려놓고 명상과 깊은 사고에 시간을 쓰고 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일기에 계속 써가도록 노력해야겠다.




3

새로운 방에서!

오늘 오후 드디어 방을 옮겼다. 생각보다 방이랑 화장실이 작기는 한데 그래도 방 안에 화장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편하다. 아직은 원래의 방이 더 익숙하고 편한 느낌이 남아있지만, 아마 하루만 지나도 원래의 방을 못 쓸 것 같다. 특히 어제 잠들기 전 밤에 화장실을 갔는데 꼽등이가 긴 더듬이를 더듬거리며 소변을 보고 있는 나에게로 조금씩 기어 오던 게 너무 소름 끼치는 경험이었다. 지금 새 방에선 더 이상 손을 씻거나 화장실을 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나갈 일이 없기에 특히 밤이 되어서가 너무 편하다. 원래 방에서 지낼 땐 밤이 되면 방을 나설 때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불도 꺼야 하고, 신발에 벌레가 있는지 어두운 밤 후레시를 비춰가며 보고서 신발을 신어야 했고, 화장실 가는 길 내내 풀들을 밟고 지나야 하기에 혹시나 개구리가 발아래 밟히진 않을지 계속 발밑을 비춰가며 걸어야 했다. 이제는 이런 불편함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 아쉬운 것은 바로 옆에 다른 사람들과 스님들께서 지내시는 방들이 있어 늦게까지 문을 열어놓고 지내는 게 조금 불편하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방의 책상에서 쓰는 일기, 아내가 챙겨줬던 물품들




4

빨래와 사념

오늘은 날씨가 좋을 거란 기상예보가 있었기에 빨래를 하기로 했다. 아침에 빨래를 하러 갔는데, 다른 사람이 이미 빨래를 엄청나게 많이 하고서 모든 빨래를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집게를 써서 걸어두셨다. 아마 저번에 밤에 빨래방에서 안 좋은 얘기를 했었던, 안 좋은 이미지가 있는 그 남자분이신 듯하다. 왜 나는 이렇게 한 번 생긴 인상으로 한 사람을 계속 언짢게 생각할까? 나 스스로 한심하단 생각이 든다. 이런 불필요하고 자기 파괴적인 집착이나 사념이 생겨날 때 편하게 바라보고 버릴 수 있도록 언제나 노력해야겠다.




5

<행운에 속지 마라>를 읽고

어제 <코스모스>를 다 본 후에 <행운에 속지 마라>를 곧바로 펼쳐 보기 시작했다. 어젯밤 자려고 누웠다가 모처럼 잠이 잘 오질 않아 12시에 불을 켜서 <행운에 속지 마라>를 끝까지 다 읽고 잤다. 이 책의 저자는 정말 금융계에서 아웃사이더인 사람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주요 주장들은 재밌고 설득력이 있다.


보통은 개인의 능력의 결과라 말하는 대부분의 현상은 많은 경우가 실은 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영웅적 이야기는 거대한 운이 따랐기에 나타난 결과라고 주장한다. 책에서 그는 특히 투자 분야에서의 거대한 성공은 운에 의한 결과라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성공에서 공식을 찾아 새로운 도전에 적용하지만, 이전의 성공이 운에 의한 결과였단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큰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는 큰 실패를 맞이하고 몰락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조롱한다. 하지만 그도 운에 인생을 거는 리스크 있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는 얘기하지 않는다. 단지 운을 실력이라 착각하고 과거의 성공 공식을 미래에 적용하지 말라고 할 뿐이다. 큰 성공이란 결과가 운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성공의 반대에 있는 실패의 결과가 있는 삶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리스크를 짊어져도 된다. 저자가 로또의 예를 들었는데 나도 로또를 예로 들면, 로또는 매우 높은 확률로 실패하고 아주 일부만 성공한다. 로또에 당첨되지 않은 현재의 삶을 사랑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만이 로또를 사야 한다는 것이다. 로또가 당첨되지 않은 현실이 탈출하고 싶은 지옥 같은 삶이라면 로또보다 더 확실한 전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저자가 책 전체에서 또 말하는 다른 주장은 일반적으로 우리 두뇌가 보내는 신호는 대부분 비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확신에 찬 신호를 뇌에서 보낼 때는 그대로 행동하기보다는 다시 한번 이성적으로 그 신호를 판단해 합리적인 선택인지를 따져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의 이전글 쌍봉사 일기 7/19(화):인류의 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