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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오 김 Feb 10. 2024

"불 키고 자면 왜 안 되나요?" - 문법과 재분석

'불 키다'가 생겨난 배경?

어렸을 때부터 내게는 아주 좋지 못한 습관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불을 켜 두고 침대에 엎드려 밤 늦게까지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거나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뭘 하다가 불을 끄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면 다음 날이 무척 피곤하다.

아무리 많이 자도 제대로 잔 것 같지가 않고, 왠지 모르게 몸 여기저기가 아픈 느낌이 든다.


어제도 잠들기 전에 미처 불을 끄지 못했다.

예전에 구매했던 고 가쓰히로(오승호) 작가의 소설 <폭탄>을 요즘 열심히 읽고 있는데,

어제도 밤 늦게까지 그 소설을 보다가 그만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왠지 모르게 몸이 찌뿌둥하고 피로가 덜 풀린 느낌이 든다.

그런데 문득 궁금하다. 불을 안 끄고 자면 정말 몸에 좋지 않을까?

검색을 해 보니 정말 그렇다고 한다. (사실은 예전에 검색해서 이미 알고 있었음. -> 함축 취소라기보다 모순인 듯?)



불을 끄지 않고 잠을 자면 당뇨병, 비만, 심혈관질환의 위험이 증가한다고 하네요~


우리 이제 꼭 불을 끄고 잠들기로 해요~


이제까지 "불을 안 끄고 잠에 들면 몸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끝.

(충격적이게도 이 네이버 블로그 따봉 스티커는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다고 해서 어디서 그냥 스샷으로 가져왔다.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더라니...)




언어학 블로그에서 이런 얘기만 하고 끝내려는 건 아니고,

검색 결과가 흥미로워서 그 얘기를 좀 하려고 한다.


'불 켠 채로 잠'이라는 검색어로 검색을 했는데, '불 켜고 자면'이라는 제목들 사이에 간간이 '불(을) 키고'라는 어형이 눈에 띈다.


대충 보니 어느 정도 공적인 성격이 있는 기사에서는 주로 '켜고'를 사용하는 반면,

블로그나 질문 글처럼 좀더 일상적인 맥락에서는 '키고'도 보인다.


구글 검색으로 빈도를 대략 비교해 보면 이렇다.

'불 켜고'는 117천 건


'불 키고'는 195천 건


'불 켜고'는 11만 7천 건이 검색되는데 '불 키고'는 19만 5천 건이 검색된다.

단순한 검색이지만 우선은 '키고' 쪽이 훨씬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구어에서 일상적으로 '키고'를 상당히 많이 쓰는 편이고,

어느 시점 전까지는 '켜고'라는 어형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켜고'랑 '키고' 중에 뭐가 '맞아요?'"라는 질문이 가장 많을 테니 우선 그것부터 얘기하자면,

'켜고'가 표준이고 '키고'가 비표준이다.

(전자가 맞고 후자가 틀린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개인적으로 거부감이 있다.)


'물이 킨다'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키다'라는 표준어 단어가 있긴 있는데 불을 켠다는 뜻하고는 전혀 무관한 단어이고,

솔직히 나랑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온 2030 세대라면 거의 못 들어 본 단어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이 글의 독자가 으레 생각하는 '키다'는 비표준어일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언어학 블로그에서 어느 어형이 표준이고 어느 어형이 비표준이라는 얘기만 하려고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이 글의 진짜 주제는 이것이다.


'켜고'가 표준이고 또 예전부터 항상 사용되어 온 어형이라면, [1]

'키고'라는 비표준 어형은 왜 생겨났을까?


우선 '켜다'와 '키다'의 활용 양상을 살펴보자.


위와 같이, 기본형이 '켜다'일 때와 기본형이 '키다'일 때,

'-고'나 '-는' 등의 자음 어미 앞에서는 두 경우가 분명히 구분되지만,

'-어' 류의 모음 어미 앞에서는 기본형이 '켜다'든 '키다'든 완전히 똑같은 활용형이 사용된다.


물론 구조적으로는 다르다.

'켜다'의 활용형 '켜- + -어 = 켜'는 어미의 모음 'ㅓ'가 탈락한 것이고,

'키다'의 활용형 '키- + -어 = 켜'는 어간 말 모음 'ㅣ'와 어미의 모음 'ㅓ'가 이중모음 'ㅕ'로 축약된 것이다.


그러나 언어 사용자들은 의외로 그런 자세한 사정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표면적으로 '켜'라는 공통의 어형이 감지된다는 데에만 주목하는 편인 듯하다.[2]


어쨌든 이러한 양상은 비단 '켜-'와 '키-'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간이 ㅕ로 끝나는 용언과 어간이 ㅣ로 끝나는 용언의 쌍에서는 거의 늘 비슷한 표가 만들어진다.

'팔굽혀펴기'의 '펴다'를 보자.

'불을 키다'와 평행하게 '책을 피다'라는 비표준형이 매우 자주 쓰이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를 일반화하면 아래와 같은 표를 만들 수 있다. (C는 임의의 자음)

'(땅을) 기다'나 '(머리에) 이다'처럼 ㅕ로 축약이 안 되는 것 같은 예들도 있지만[3] 대부분은 가능하다.

(방언의 형용사 '기다(다른 게 아니라 X가 맞다)'나 서술격조사 '-이다'는 위 표와 같이 '겨, 여'와 같은 축약형을 쓰는 데 문제가 없다. '-이다'의 종결형은 표준어에서 '-여'가 아니라 '-야'지만)


위 표에서 왼쪽에 등장하는, 어간이 이중모음 '-ㅕ'로 끝나는 용언은 개수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솔직히 나로서는 위에 제시한 '켜다'와 '펴다' 말고는 다른 예가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반면 위 표에서 오른쪽에 등장하는, 어간이 '-ㅣ'로 끝나는 용언은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끝이 없다. '먹이다', '눕히다', '늘리다'처럼 접미사 '-이-, -히-, -리-, -기-'로 끝나는 용언 어간만 나열해도 한세월 걸릴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어 데이터 안에서 임의의 'Cㅕ'류 어형을 마주했을 때,

그것이 'Cㅕ다'의 활용형일 확률은 그것이 'Cㅣ다'의 활용형일 확률보다 훨씬 작을 거라고 추론할 수 있다.

(코퍼스를 잘 다루면 정말 본격적인 계산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이 말을 한국어 사용자의 입장에서 조금 바꿔서 표현하자면 이렇게 된다.


한국어 사용자가 'Cㅕ'라는 어형을 마주쳐서 그 기본형이 'Cㅕ다'인지 'Cㅣ다'인지 고르는 과제를 풀어야 한다면,

'Cㅣ다' 쪽에 베팅하는 편이 'Cㅕ다' 쪽보다 훨씬 성공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어느 세대에선가부터 '켜다'의 활용형 '켜'를 들었을 때 그것이 '키다'의 활용형일 거라고 추론하는 일이 잦아졌을 것이다.


요컨대 윗세대에서는 '불 켜'의 '켜'를 '켜- + -어 = 켜'로 의도하고 말했겠지만,

아랫세대에서는 그 '켜'를 듣고 '키- + -어 = 켜'재분석(reanalysis)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에서 흔히 쓰이는 '불을 키고', '책을 피고' 등의 어형이 등장한 데에는 아마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1] '켜다'의 어원도 언어학적으로 매우 흥미롭다. 자세한 것은 김현주 선생님의 2018년 논문 <“X-를 켜다” 구문의 등장과 그 환유적 확장: 신문물의 수용과 언어변화> 참조



[2] 언어학자 Bernd Heine는 1997년 저서 Cognitive Foundations of Grammar의 101페이지에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말이다.

"(What all this seems to imply is that) people do not care much about what morphological or syntactic complexities and irregularities they create by choosing a certain schema; there must be other motivations that are of greater concern to them."



[3] 네이버 블로그의 서로이웃 타래 님께서 알려주셔서 보니 표준국어대사전에 '겨'도 '여'도 있다.

다만 현실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건,

"저는 왠지 '줄다'의 활용형 '준'이 회피되는 것과 좀 비슷한 동기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전에 썼던 글에서는 '주다'와의 동음이의 회피를 지적했지만 그것 말고도 너무 짧은(?) 어형은 다른 어형들과의 변별력이 좀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

'(머리에) 이다'도 확인해 보니 표준국어대사전에 '여'가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 거의 못 본 건 어느 정도 비슷한 동기가 있지 않을지..."


'(땅을) 기다'는 아마 '기어서, 기었다'만 가능하고 '*겨서, *겼다'는 안 되는데 왜 그런지 궁금하다.

중세국어에서 '긔다'였기 때문일까 했는데, '(꽃이) 피다'도 중세국어에서는 '프다/퓌다/픠다'였다.


나한테는 거의 passive하게만 존재하는 단어지만 '(머리에) 이다'도 왠지 '(머리에) 여서, 였다'는 될지 안 될지 잘 모르겠는 느낌이다.



+ '켜다'의 기본형이 '키다'인지 '켜다'인지 하는 문제는 언어와 매체 등 국어 문법 시험에도 나올 만해 보인다.


+ '들이켜다'와 '들이키다'가 표준어에서는 별개의 단어라고 한다. 이쪽도 '들이키다'로 수렴해 버린 것 같다.

사실 나한테 표준어의 '들이키다'는 매우 낯선 단어라서 수렴이라기보다 그냥 '들이켜다' 의미가 '들이키다' 단어의 의미 자리를 완전히 차지해 버린 느낌이다.

https://m.blog.naver.com/lms2179090/221996362432


+ 어제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나 봤는데, 거기서도 '불 키라고!!!!'라는 대사가 나왔었다.

글로 쓰인 대본에 따라 연기를 하는 것일 텐데도 '키라고'라는 비표준 어형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키다'가 공고히 자리잡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어쩌면 구어적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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