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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중철 Oct 14. 2022

나의 근자감


나의 근자감 


한국외대 명예교수 곽중철

 

한국계 수학자로는 처음으로 ‘수학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모교인 서울대에서 후배들에게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전했다고 한다.


1971년 영남의 명문 대구 경북고의 3학년이던 필자는 서울대 입시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실망하신 아버님은 당연히도 재수를 권하셨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나는 재수가 싫었다. 아니, 재수할 자신이 없었다. 그 놈의 지겨운 당시 전과목 출제의 암기과목들이 특히 싫었고 자신이 없었다. 일단 외대를 가서 반수라도 해보겠다는 내 연막전술에 부친은 속아 넘어가셨는지 외대 입시 영어과에 붙자 등록금을 주셨다.


당시 내가 어렴풋이 갖고 있던 것이 근자감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 당장 전과목 입시 준비는 싫지만 영어를 전공해 외대를 졸업하면 사회에서는 뭔가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그 때 부친은 허락하시지 않았어야 한다. 재수 비용을 줄 테니 재수해 서울대 가서 사법이든 외무든 고시에 도전하라고 엄명(?)하셨어야 한다. 옛 부모님들이 왜 법대나 의대를 가라고들 하셨는지 그들의 나이가 되니 알 것 같다. 어른들 말씀이란 원래 하나도 그른 게 없는 법… 


다른 한편으로 내게는 딴 재주가 있었던 거다. 암기는 못해도 모국어든 외국어든 언어에는 자신이 있었고 노래든 음악이든 ‘소리’에 관심이 많았다. 부친의 소망은 아들들 보다는 손자, 즉 형님의 세 아들이 각각 외무, 사법, 언론 고시에 붙어 한을 풀어드렸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호사가들은 나보고 “‘통역’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일가를 이룬다는 말--- 학문이나 기술, 예술 등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려면 기본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한다. 물론 타고난 재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과정이 더해져야 하고, 거기에 이르는 이른 바 시절인연이라는 것이 도래해야 한다. 씨앗이 발아하려면 적당한 토질과 수분과 기온이라는 조건이 두루 갖춰져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마침내 한송이 꽃이 되려면 목숨을 건 일전의 고비를 반드시 넘어야한다. 미쳐야 미친다’(不要不急)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란다. 

스스로 재능을 발견하고 절차탁마하는


[1]


내 경우를 이 주장에 대입해 본다.


1.   기본적으로 타고난 재능


부친은 일제시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일본어는 언제나 1등이셨단다. 먼저 외대를 나온 형은 영어의 광팬이었다. 카우보이 영화는 모조리 섭렵하면서 동생인 나를 데리고 극장 출입을 했다. 내가 고교 1학년이었을 때 나를 대학생 리더즈 다이제스크 독해반에 등록시켜 공부하게 했다.

형은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다가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MBC에 지원했고 사투리 억양 때문에 PD로 방향을 틀었다. 작은 집의 사촌 하나는 “큰 집 형들은 입으로 하는 건 뭐든지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평했다. 형과 나는 가요 등 노래에도 일가견이 있다.


2.    스스로 재능을 발견하고 절차 탁마해야 한다.


어느 가수선발 프로그램의 `호랑이` 심사위원은 "타고난 재능보다 더 좋은 기술은 없다"는 말을 한다. 그렇다고 재능을 타고나면 모두가 쉽게 대가가 될 수 있을까? 두각을 드러내는 천재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타고 나면 모두가 쉽게 대가가 되는 게 아니고, 두각을 드러내는 천재들의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발명왕 에디슨은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라고 했다. 이를 바꿔 말하면 99%의 노력을 하더라도 나머지 1%는 타고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 완벽의 경지에 가까워질 수 있어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천재들은 무대에서 범재들보다 더 노심초사하고 긴장한다. 그런 긴장과 집중력 없이는 완벽할 수 없고, 완벽하기가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발표가 끝나면 바둑 기사들처럼 자신의 기록을 복기(復碁)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축구, 야구, 골프 등 운동도 마찬가지다.

 

3.    시절인연이라는 것이 도래해야 한다.


필자가 태어난 1953년 유럽에서는 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와 세계번역가연맹(FIT)이 태동하였다. 나는 23년 후 학군(ROTC)의 통역 장교가 되어 조국의 부름으로 육군 행정학교의 영어교관, 대통령 경호실의 번역요원으로 통번역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시대의 흐름과 갈등이 가장 치열하고 절실하게 나타나는 순간이 TV 뉴스 동시통역이라면 필자는 한국 최초의 TV 통역사로 역사의 앞머리에서 예봉을 맞았고 TV 뉴스통역이 전공분야가 되었다. 


1983년 7월 파리 유학에서 귀국하자 말자 1983년 9월 1일 KAL Boeing 747 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격추되어 269명 모두가 사망했다. 엄청난 사건인지라 당시 여의도 KBS에서는 한국 최초 TV 위성대담 동시통역을 시도했고 내가 통역을 맡았다. 


개천절인 10월 3일부터 12일 동안은 국회에서 국제의회연맹(IPU) 서울 총회가 열렸는데 후배들, 그리고 외국 동료들과 함께 신나게 통역하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9일 동남아를 순방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미얀마(버마)에서 아웅산 국립묘지 폭파사태를 맞아 17명의 고위관리가 운명을 달리했다. 그러자 IPU의 후반 일정은 랑군에서 희생된 우리 인사들을 추모하는 연설로 덮였다. 내 목소리가 조사를 통역하는 데 최고로 슬픈 음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통령 일행이 돌아오자 폭파 사태에 따른 국제 위성

TV 

대담의 통역도 내 몫이었다

.


여의도 세 공중파 방송사를 돌아다니며 통역을 하는 대목을 맞았다

.


1984년에는 미국대선 TV 토론에서 레이건 후보가 먼데일 후보에게 "나는 상대후보의 젊음이나 미숙함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지 않겠다 (I will not make age an issue of this campaign.            I am not going to exploit, for political purposes, my opponent's youth and inexperience.)"라는 절묘한 발언을 했는데 그 장면도 필자가 직접 동시 통역했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걸프전(1991.1.17-2.28) CNN 생중계도 통역했으며 YTN 국제부장으로 일할 때는 영국 다이애나비 장례식(1997.09.07)을 런던 Kensington 궁전에서 식장인 Westminster 사원을 거쳐 Northampton 가족묘지로 떠나기 전까지 2시간동안 혼자서 중계 통역 해설을 해 정점을 찍었다. 2001년 9월 11일 (09:00-17:20) 항공기납치 동시다발 자살테러로 뉴욕의 110층 WTC가 붕괴됐을 때도 증인이 되었다. 

 

생후 35년 째의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렸고 필자는 나이 30대 초반에 스카우트 돼 통역안내과장으로 올림픽에 청춘을 불사른 후 1988년 2월 한국 최초로 AIIC 정회원이 되었다. 올림픽 조직위원장이 대통령이 되자 청와대 춘추관에서 근무하는 공보비서관이 되어 5년 동안 대통령을 영어와 불어로 통역했다. 한국 최초 24시간 뉴스채널의 국제부장으로 5년 일한 후 졸업 16년만에 모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교수 정년을 맞았던 이공일팔 년에는 FIT의 이사가 되었고 이듬해 40주년을 맞은 모교에서 제9차아태지역번역포럼(APTIF9)을 주최하였다. 근자감이 현실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체험한 것이다.

 

4.   마침내 한송이 꽃이 되려면 목숨을 건 일전의 고비를 반드시 넘어야 한다.


필자에게는 파리유학이 인생의 가장 힘든 고비였다. 불가능해 보였던 공부를 3년 만에 마치고 나니 그 고통으로 점철된 기억은 잊힐 것 같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그 학교 에지트ESIT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자리잡았고, 나는 올림픽 전 후배들을 그 학교에 보내 수학하게 함으로써 한국 정부의 올림픽 관련 예산 일부를 그 학교에 하사한 산타클로스가 되었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는 말처럼 나는 한국 1세대 통역사로서 일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내게 근자감을 불러일으켜준 가족, 스승, 선배, 동료들에게 영광을 돌린다.  

한국외대 명예교수 곽중철

 

한국계 수학자로는 처음으로 ‘수학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모교인 서울대에서 후배들에게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전했다고 한다.


1971년 영남의 명문 대구 경북고의 3학년이던 필자는 서울대 입시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실망하신 아버님은 당연히도 재수를 권하셨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나는 재수가 싫었다. 아니, 재수할 자신이 없었다. 그 놈의 지겨운 당시 전과목 출제의 암기과목들이 특히 싫었고 자신이 없었다. 일단 외대를 가서 반수라도 해보겠다는 내 연막전술에 부친은 속아 넘어가셨는지 외대 입시 영어과에 붙자 등록금을 주셨다.


당시 내가 어렴풋이 갖고 있던 것이 근자감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 당장 전과목 입시 준비는 싫지만 영어를 전공해 외대를 졸업하면 사회에서는 뭔가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그 때 부친은 허락하시지 않았어야 한다. 재수 비용을 줄 테니 재수해 서울대 가서 사법이든 외무든 고시에 도전하라고 엄명(?)하셨어야 한다. 옛 부모님들이 왜 법대나 의대를 가라고들 하셨는지 그들의 나이가 되니 알 것 같다. 어른들 말씀이란 원래 하나도 그른 게 없는 법… 


다른 한편으로 내게는 딴 재주가 있었던 거다. 암기는 못해도 모국어든 외국어든 언어에는 자신이 있었고 노래든 음악이든 ‘소리’에 관심이 많았다. 부친의 소망은 아들들 보다는 손자, 즉 형님의 세 아들이 각각 외무, 사법, 언론 고시에 붙어 한을 풀어드렸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호사가들은 나보고 “‘통역’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일가를 이룬다는 말--- 학문이나 기술, 예술 등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려면 기본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한다. 물론 타고난 재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과정이 더해져야 하고, 거기에 이르는 이른 바 시절인연이라는 것이 도래해야 한다. 씨앗이 발아하려면 적당한 토질과 수분과 기온이라는 조건이 두루 갖춰져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마침내 한송이 꽃이 되려면 목숨을 건 일전의 고비를 반드시 넘어야한다. 미쳐야 미친다’(不要不急)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란다. 

스스로 재능을 발견하고 절차탁마하는


[1]


내 경우를 이 주장에 대입해 본다.


1.   기본적으로 타고난 재능


부친은 일제시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일본어는 언제나 1등이셨단다. 먼저 외대를 나온 형은 영어의 광팬이었다. 카우보이 영화는 모조리 섭렵하면서 동생인 나를 데리고 극장 출입을 했다. 내가 고교 1학년이었을 때 나를 대학생 리더즈 다이제스크 독해반에 등록시켜 공부하게 했다.

형은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다가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MBC에 지원했고 사투리 억양 때문에 PD로 방향을 틀었다. 작은 집의 사촌 하나는 “큰 집 형들은 입으로 하는 건 뭐든지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평했다. 형과 나는 가요 등 노래에도 일가견이 있다.


2.    스스로 재능을 발견하고 절차 탁마해야 한다.


어느 가수선발 프로그램의 `호랑이` 심사위원은 "타고난 재능보다 더 좋은 기술은 없다"는 말을 한다. 그렇다고 재능을 타고나면 모두가 쉽게 대가가 될 수 있을까? 두각을 드러내는 천재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타고 나면 모두가 쉽게 대가가 되는 게 아니고, 두각을 드러내는 천재들의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발명왕 에디슨은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라고 했다. 이를 바꿔 말하면 99%의 노력을 하더라도 나머지 1%는 타고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 완벽의 경지에 가까워질 수 있어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천재들은 무대에서 범재들보다 더 노심초사하고 긴장한다. 그런 긴장과 집중력 없이는 완벽할 수 없고, 완벽하기가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발표가 끝나면 바둑 기사들처럼 자신의 기록을 복기(復碁)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축구, 야구, 골프 등 운동도 마찬가지다.

 

3.    시절인연이라는 것이 도래해야 한다.


필자가 태어난 1953년 유럽에서는 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와 세계번역가연맹(FIT)이 태동하였다. 나는 23년 후 학군(ROTC)의 통역 장교가 되어 조국의 부름으로 육군 행정학교의 영어교관, 대통령 경호실의 번역요원으로 통번역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시대의 흐름과 갈등이 가장 치열하고 절실하게 나타나는 순간이 TV 뉴스 동시통역이라면 필자는 한국 최초의 TV 통역사로 역사의 앞머리에서 예봉을 맞았고 TV 뉴스통역이 전공분야가 되었다. 


1983년 7월 파리 유학에서 귀국하자 말자 1983년 9월 1일 KAL Boeing 747 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격추되어 269명 모두가 사망했다. 엄청난 사건인지라 당시 여의도 KBS에서는 한국 최초 TV 위성대담 동시통역을 시도했고 내가 통역을 맡았다. 


개천절인 10월 3일부터 12일 동안은 국회에서 국제의회연맹(IPU) 서울 총회가 열렸는데 후배들, 그리고 외국 동료들과 함께 신나게 통역하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9일 동남아를 순방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미얀마(버마)에서 아웅산 국립묘지 폭파사태를 맞아 17명의 고위관리가 운명을 달리했다. 그러자 IPU의 후반 일정은 랑군에서 희생된 우리 인사들을 추모하는 연설로 덮였다. 내 목소리가 조사를 통역하는 데 최고로 슬픈 음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통령 일행이 돌아오자 폭파 사태에 따른 국제 위성

TV 

대담의 통역도 내 몫이었다

.


여의도 세 공중파 방송사를 돌아다니며 통역을 하는 대목을 맞았다

.


1984년에는 미국대선 TV 토론에서 레이건 후보가 먼데일 후보에게 "나는 상대후보의 젊음이나 미숙함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지 않겠다 (I will not make age an issue of this campaign.            I am not going to exploit, for political purposes, my opponent's youth and inexperience.)"라는 절묘한 발언을 했는데 그 장면도 필자가 직접 동시 통역했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걸프전(1991.1.17-2.28) CNN 생중계도 통역했으며 YTN 국제부장으로 일할 때는 영국 다이애나비 장례식(1997.09.07)을 런던 Kensington 궁전에서 식장인 Westminster 사원을 거쳐 Northampton 가족묘지로 떠나기 전까지 2시간동안 혼자서 중계 통역 해설을 해 정점을 찍었다. 2001년 9월 11일 (09:00-17:20) 항공기납치 동시다발 자살테러로 뉴욕의 110층 WTC가 붕괴됐을 때도 증인이 되었다. 

 

생후 35년 째의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렸고 필자는 나이 30대 초반에 스카우트 돼 통역안내과장으로 올림픽에 청춘을 불사른 후 1988년 2월 한국 최초로 AIIC 정회원이 되었다. 올림픽 조직위원장이 대통령이 되자 청와대 춘추관에서 근무하는 공보비서관이 되어 5년 동안 대통령을 영어와 불어로 통역했다. 한국 최초 24시간 뉴스채널의 국제부장으로 5년 일한 후 졸업 16년만에 모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교수 정년을 맞았던 이공일팔 년에는 FIT의 이사가 되었고 이듬해 40주년을 맞은 모교에서 제9차아태지역번역포럼(APTIF9)을 주최하였다. 근자감이 현실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체험한 것이다.

 

4.   마침내 한송이 꽃이 되려면 목숨을 건 일전의 고비를 반드시 넘어야 한다.


필자에게는 파리유학이 인생의 가장 힘든 고비였다. 불가능해 보였던 공부를 3년 만에 마치고 나니 그 고통으로 점철된 기억은 잊힐 것 같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그 학교 에지트ESIT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자리잡았고, 나는 올림픽 전 후배들을 그 학교에 보내 수학하게 함으로써 한국 정부의 올림픽 관련 예산 일부를 그 학교에 하사한 산타클로스가 되었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는 말처럼 나는 한국 1세대 통역사로서 일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내게 근자감을 불러일으켜준 가족, 스승, 선배, 동료들에게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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