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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Jul 12. 2023

귀신이 낮에 출몰하는 이유


에어컨이 없던 어린 시절, 오싹한 납량특집 드라마를 보며 한여름밤의 더위를 식히곤 했다. 그 시절의 귀신들은 시간 개념이 철저해 자정을 알리는 벽시계의 묵직한 소리를 들은 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벽녘까지 활동을 하다가 사찰의 종소리나 닭 울음소리가 들리면 하던 짓을 즉각 멈추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호러물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귀신들(악귀, 악마, 유령 등을 총칭) 활동 시간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깊은 밤시간 보다 밝은 대낮에 출몰하는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어떤 연유로 귀신들이 백주대낮에도 활동을 하게 된 것일까?


환경변화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인간들은 늦은 밤까지 일하고 먹고 마시고 노느라 도시는 늘 불야성이다. 야근족이 사는 빌딩숲의 불빛, 밤거리의 화려한 조명, 새벽까지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 라이트.

예전 선배 귀신들이 활동하던 시절의 불빛 한 점 없는 캄캄한 밤은 오래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상대적으로 어둠이 많이 남아있는 시골 지역으로 내려가 보았지만, 귀신을 보고 까무러칠만한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없었다. 귀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겁 없는 노인들 뿐이었다.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이 사라지면 귀신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인간들의 밤이 다시 암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귀신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수 만년 동안 이어온 밤의 무대를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인간들이 벌건 대낮에 만난 귀신을 과연 무서워할지도 의문이었다. 자칫하면 귀신의 위신이 도깨비나 요정 정도의 유치한 수준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만 고집하다가는 멸종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발동하자 변화를 갈망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귀신들은 오랫동안 고심과 격론거듭 한 끝에 결국 역사적인 결단을 내렸다. 인간들처럼 밤낮을 구분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어두컴컴한 밤에 비해 진지함과 스릴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한낮에도 귀신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귀신들의 결정에는 물귀신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대부분 귀신들이 밤에만 움직이던 시대에도 물귀신은 주로 낮시간에 활동했다. 댐이 생기면서 화천의 물이 줄어들고, 수영장과 해수욕장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바람에 지금은 존재감이 약해졌지만, 물귀신은 엄연히 '낮귀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귀신들이 낮시간에 출몰하기 시작하 초창기 무렵, 인간들은 이들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낮귀신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세상에 알린 사람들은 영화와 드라마의 시나리오 작가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비로소 밝은 대낮, 우리들 주변 가까운 곳 어디에서나 귀신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게 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갑자기 맞닥뜨릴 때의 느낌과 충격은 평소 보다 몇 배 더 증폭된다. 공포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화면이 어두워지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을 느낀. 그러다가, 화면이 밝은 낮으로 바뀌면 긴장을 풀고 잠시 숨을 고른다. 바로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인공 바로 앞에 귀신이 불쑥 나타난다. 허를 찔린 관객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지른다.


귀신의 대낮 출몰은 작가가 자신의 상상력이나 감으로 알아낸 것인지, 아니면 귀신이 우연히 영화를 관람하다가 힌트를 얻은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것은, 예상치 못한 귀신의 역발상과 정면돌파가 먹혀든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오래된 관성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안락한 익숙함과 내가 가진 일부를 버리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 때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생각에서 통찰을 얻고,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무모한 도전을 할 때 성공이 보인다.


무더운 여름, 더위도 식힐 겸 어딘가에 있을 낮귀신을 만나 익숙한 밤을 포기한 용기와 새롭게 시도한 도전에 대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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