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의 열기가 여전하다. 나 역시 서바이벌 경연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고 있다. 새로운 꿈을 향한 간절한 바람과 치열한 대결이 어우러진 무대에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다. 예측하기 힘든 승패의 쫄깃한 긴장감 또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선사하는 묘미이다.
최근에는 관전 포인트가 하나 더 생겼다. 바로 무대 반대 편에서 참가자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심사위원들의 모습이다. 트렌드에 맞춰 진화하는 오디션의 평가방식과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은 무대 위 대결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 장시간의 심사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몰입감, 촌철살인의 지적과 진정성이 느껴지는 조언, 미세한 차이를 귀신같이 찾아내는 감각. 그리고,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렵게 내리는 결단!
판정은 오롯이 심사위원 각자의 소신과 주관에 맡겨져 있다. 경연 초반에는 그나마 옥석을 가리기가 쉬운 편이다. 하지만, 회차를 거듭할수록 심사 난이도가 점점 높아진다. 옥중의 옥을 골라야 하는 심사위원들의 고심도 덩달아 깊어진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심사석 여기저기에서 결정장애를 호소하는 한숨과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다.
'잘하는 사람을 골라내기는 쉽지 않다. 아니다 싶은 사람을 하나씩 탈락시키다 보면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싱어게인 심사위원 윤종신 프로듀서가 한 말이다.
기량이 비슷한 피평가자들의 우열을 가리는 일이 얼마나 난해하고 난감한지는 평가를 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더군다나, 정성평가와 상대평가가 혼합된 방식이면 평가는 극한 작업이 된다. 아무리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음악(노래) 전문가라 하더라도 계량화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다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의 뇌는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입력되면 순간적으로 인지적 선택 과부하를 일으킨다. 이때 혼란에 빠진 뇌는 판단 기준을 거꾸로 뒤집어 버린다.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한 판단을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더 못하는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감점 요인이 오히려 더 쉽고 간단한 변별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0명의 후보 중에서 결혼할 상대를 고른다고 치자. 마음이 끌리는 한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9명을 차례대로 탈락시킨 후 마지막에 남는 한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다. 보통의 경우(특히, 나이가 젊을수록)에는 첫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한두 가지 매력에 끌려 결혼했다가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과거 왕조시대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후보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이모저모 따지고 비교하면서 흠결이 있는 후보부터 하나씩 제외시킨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남는(리스크가 가장 적어 보이는) 후보가 왕비로 최종 간택된다. 실패 확률을 낮춤으로써 성공 확률을 높이는 전략이다.
다만, 이 전략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후보들 중에 반드시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이 비교만 하다가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된다. 최선을 고집하다가 차선마저 놓치고, 결국에는 최악을 선택하는 상황으로 몰릴 수도 있다.
직장 인사평가도 오디션 평가방식을 많이 닮았다. 30대까지는 옥석을 가리기가 쉬운 편이다. 이 시기에는 단점이나 부족한 점이 바로 드러난다. 실수가 잦거나, 근무 태도가 불량하거나, 실적이 형편없거나,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평가자는 큰 고민을 하지 않고도 등급 순위를 매길 수 있다. 서바이벌 경연 초반에 심사위원들이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누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하지만, 40대 이후부터는 경쟁의 양상과 평가기준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서바이벌 경연으로 치면 중후반에 들어선 것이다. 한 차례 옥석이 가려진 뒤 살아남았다는 것은 기본적인 역량은 갖추었다고 봐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어지면 평가자는 '아니다 싶은' 직원부터 찾으려고 한다. 리더십이 부족하거나, 조직에 대한 로열티가 떨어지거나, 감정조절을 못하거나. 사소한 실수 하나가 평가자의 눈밖에 날 수도 있다.
특출 난 능력이나 뛰어난 성과가 없는데도 의외로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실수가 적고 단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가를 받는 입장이라면 자신의 단점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 조직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한 중요한 기술이다. 자신의 장점을 상사에게 지나치게 어필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단점을 쉽게 노출시키고 만다. 스스로 '아니다 싶은'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꼴이 되고 만다.
평가자라면 적합한 사람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조직에 부적합한 사람부터 골라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피평가자의 화려한 스펙이나 단기 성과에 현혹되지 말고, 교묘하게 가려진 단점을 냉철하게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높은 직급과 중요한 자리에 대한 평가일수록 더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