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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Apr 13. 2024

투표소 가는 길


사전투표 둘째 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본투표 일에 특별한 일정이 없는데도 미리 표를 하고 싶어 몸이 달았던 것이다. 아내는 평소 주말이면 아주 긴 늦잠을 자는데 어쩐 일인지 순순히 나의 재촉에 동조해 주었다.


다행히도 아내와 나는 비슷한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다. 오랜 시간 같이 살면서 남편한테 가스라이팅 당한 게 분명해 보인다. 가끔은 발언 수위가 나보다 더 높을 때도 있다. 그 바람에 친정 부모님들과는 살짝 거리가 생기고 말았다.


투표소로 가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최근 이슈들로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살면서 이렇게 쿵짝이 잘 맞은 적이 있었던가. 투표소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벌써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줄 서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아내는 벚꽃놀이부터 하자며 내 소매를 끌었다. 개천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벚나무에 분홍빛 꽃잎이 만개해 있었다. 아내는 두 팔을 벌리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아내와 나는 벚꽃을 감상하며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한차례 실바람이 훑고 지나가자 꽃잎이 반짝거리며 어지럽게 떨어졌다. '당선자가 나오는 4일 뒤에는 벚꽃도 다 지고 없겠지..' 문득 국회의원 임기가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불면 맥없이 떨어지고 마는 권력을 누리기엔 4년이 아쉬울 것이다.


금까지 투표를 하면서 후보가 마음에 들어 찍은 경우는 한두 번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조금이나마 더 아니다 싶은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표를 . 내 나름의 기준으로 차악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내가 아무리 현명한 선택을 했더라도 나와 반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보기에는 최악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성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경험이나 주변의 영향을 받으며 후천적으로 길러지기도 다. 나는 어릴 적부터 변화를 좋아했다. 어제 같은 오늘이 끔찍하게 싫었고, 오늘 같은 내일이 계속 이어질까 두려웠다. 자고 일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날마다 기도했다. 영원할 것 같은 가난과 지긋지긋한 학교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줄 변화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쨍하게 맑은 날이 얄미웠고, 아무 일없이 평온하게 돌아가는 일상이 그렇게 따분할 수가 없었.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에는 왠지 내가 기다리던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특별하게 느껴졌.

 

혁신이나 개혁이라는 구호는 늘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철옹성 같던 부패권력이 무너지던 날의 통쾌함은 잊어줄 수가 없. 왜곡된 진실이 수십 년 만에 밝혀질 때는 가슴 벅찬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새로운 세상,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혼란이나 불편도 감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바라던 '무슨 일'은 오늘도 일어나고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일어나기대했다.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하자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냐며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돌아보니 투표소가 있는 주민센터가 제법 멀리 보였다. 발길을 돌리면서 다시 상념에 빠져 들었다. 이번에는 과연 작은 변화라도 일어날까? 내가 바라는 선거결과가 나오더라도 아무 일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일도 모레도 야속하도록 맑은 날들이 계속될 것이다. 투표소가 가까워지자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 피로가 몰려왔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투표용지를 받아 들자 조금 생기가 돌아오는 듯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차악과 최악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내가 바라는 어떤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기표용구를 꾹 눌렀다. 그리고는 두 장의 탄환을 투표함에 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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