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주의적 사고가 위험한 이유

by 시원


새해 한파가 몰아치는 거리 어디에선가 백지영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총 맞은 것처럼 구멍 난 가슴에' 한바탕 찬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벽에는 새 달력이 걸렸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12월'이 무겁게 걸려 있다. 계엄의 밤부터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다. 만약에, 계엄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체포된 군인들이 폭로하는 섬뜩한 음모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일상은 보내고 있을까? 출근길 지하철 입구에서 장갑차와 군인들을 만나고, 퇴근길에 불심검문을 당하고, 동료와 이웃 간에 서로를 의심하고, 술자리에서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로 잡혀가는 세상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 브런치 또한 감시와 검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번 내란사태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과 독재권력에 취약한 한국 사회의 체질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비상계엄과 쿠데타, 독재정권, 불법과 폭력, 극우 세력, 이념대립, 진영논리..


경제지표만으로 보면 한국은 엄연한 선진국이다. 2021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TAD)에서 한국을 선진국 그룹으로 공식 분류한 것이다. 23년 기준 1인당 GDP(국내 총생산)는 세계 21위, 인구 5천만 이상 국가들의 1인당 GNI(국민 총소득)에서는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6위에 올랐다.


다만, 경제지표를 가린 채 평가한다면 선진국이라고 할만한 요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정치 수준은 경제력 위상이 민망할 정도로 후진적이다. 우리 역사 전체를 통틀어 진정한 의미의 민주공화정이었던 기간은 채 40년도 되지 않는다.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고 곧바로 시작된 식민지배 36년, 해방 후 이승만 독재 12년, 불법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유신독재 18년, 또다시 불법으로 정권을 차지한 전두환 군사독재 7년까지 장장 37년간이나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독재정권이 이 나라를 지배했다.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직접 정권을 무너뜨린 5.16 혁명은 새로운 독재의 출현까지는 막지 못했지만, 그 정신은 6.10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마침내 서슬 퍼런 군사독재를 종식시켰다. 하지만, 독재시대로 회귀하려는 정치권력의 본능까지 잘라내지는 못했다. 독재정권에 뿌리를 둔 한국의 정치세력은 절대권력과 철권통치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투표에 의해 선출된 지위를 봉건시대 세습 계급으로 여기는가 하면,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개인의 소유물로 착각한다.


이러한 착각과 탐욕은 국민을 피지배급으로 여기던 왕조시대 절대군주와 지배계급의 전제주의적 사고를 흉내 낸 것이다. 자신들의 말이 곧 법이며, 사회질서(국가권력을 사유화하기 위한 질서) 유지를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무참하게 짓밟는다. 국가권력의 실수나 오류에 대해 불만을 표출해서는 안되며, 권력에 저항할 경우에는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 처벌한다. 심지어 국헌 문란조차도 정당한 통치행위로 간주한다. 자정 장치가 없는 전체주의적 독재 지배는 한국식 보수를 표방하는 역대 정치권력의 정치철학이자 국가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정치는 왜 후진적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경제성장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원인이지만, 봉건주의적 사고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아니, 벗어나고 싶지 않은 정치권력의 고질적인 권력욕이 바탕에 깊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민들이 원인을 제공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현실 정치는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황뿐만 아니라 사회풍토와 국민성까지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독재가 출현하기 쉬운 정치풍토는 국민 스스로가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현대사에서 실질적 민주공화정이 존재했던 기간은 37년 정도이다. 또한, 일반 국민들의 의식 속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가 권위주의 청산을 외쳤을 때만 해도 사회 시스템과 상당수 국민들은 이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부 정치세력과 사회 지도층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 성향의 국민들 조차 익숙한 독재정권의 통제와 억압의 관성에서 좀처럼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독재정권에 오랫동안 세뇌 당한 것도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국민들의 유전자 속에 봉건주의 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되고 임기가 정해진 대통령을 마치 왕조시대의 절대군주와 같은 존재로 추앙하고,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을 마치 출신에 따라 신분을 나누던 봉건시대의 상위 계급으로 인정한다. 권력자가 불법적인 힘으로라도 사회질서를 바로 잡아 주기만 한다면, 자신과 정치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국가권력이 헌법을 위반해서라도 제압해 주기만 한다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쯤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부가 아니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다가도 지지하는 정권하에서는 마치 왕족이라도 된 양 목소리를 높인다. 봉건주의적 사고가 위험한 이유는 위정자들을 유혹하고 부추기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불법과 폭력으로라도 정권을 잡기만 하면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심어준다. 사회안정과 반국가 세력 척결이라는 그럴듯한 명분만 내세우면 불법과 위헌 정도는 국민들이 이해하고 용서해 줄 것이라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


나쁜 권력은 봉건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는 국민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는데 능숙하다. 권위와 억압의 강도가 셀수록 국민들이 쉽게 굴복한다는 것을, 정적 공격이 더럽고 폭력적일수록 지지자들이 더 열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봉건주의적 사고가 반공 이데올로기와 만나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극우 세력이다. 전쟁을 경험하고 독재시대를 그리워하는 고령층의 반공 구호와 보수정권에 대한 맹목적 찬양으로 시작한 극우 세력은 이제는 백인 우월 단체 KKK나 나치 추종 세력과 같은 무시무시한 광기를 뿜어내고 있다.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는 극우 세력은 최근에는 유튜브 방송을 통해 왜곡 날조된 터무니없는 가짜 뉴스로 젊은 세대와 사회 지도층, 심지어 국가원수의 뇌까지 마비시키고 있다.


12.3 내란세력은 자신들의 성공을 얼마나 믿었을까? 경찰과 군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 무서울 게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주술적 신통력까지 기대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봉건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는 국민들이 자신들처럼 극우 유튜브의 궤변에 동조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진짜 심각한 위협은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 불리는 엘리트 집단의 극우화다"


이번 내란사태를 통해서 엘리트 집단이 그동안 내란세력과 거대한 정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장성과 경찰 수뇌부는 수개월 전부터 내란 우두머리와 친위쿠데타를 작당모의했다. 국정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은 직간접적으로 내란을 공모하거나 동조했다. 국민을 대표하고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국회의원들은 비겁한 행동과 추악한 의도로 내란을 방조하거나 묵인했다.


엘리트 계층은 누구보다도 많이 배우고 똑똑한 머리를 가진 자들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부모세대부터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도 이들 엘리트 계층은 국민의 반대편에서 현직 대통령을 도와 불법과 폭력을 저지르고, 내란 우두머리의 입이 되어 국헌 문란이 정당한 통치행위라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심지어 '백골단'을 국회로 불러들이는가 하면 주군의 집 주변을 지키며 왕정복구를 노리고 있다.


엘리트 계층의 극우화가 위험한 이유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오피니언 리더이자 국가기관의 요직에 앉아서 중요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수많은 청소년들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규모는 소수이지만 이들 집단이 부당한 권력의 편에 서게 되면 나라는 한순간에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한국 엘리트 집단의 실체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의 양반은 계급 카르텔을 500년 이상 유지하면서 단 한 번도 대중의 편에 서서 인본주의를 실천한 적이 없었다. 조선이 망할 때는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먹었다. 일제 총독부로부터 기존의 지위와 재산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들을 착취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고 처형했다. 이들 엘리트 집단은 해방 후 고스란히 이승만 독재정권 밑으로 기어들어가 권력을 독차지하고 부정부패로 부를 축적해 갔다. 자신들의 친일 행각을 감추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와 친일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용공분자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 숙청했다. 뒤이은 박정희, 전두환 두 군사독재 하에서도 대를 이어 가며 부당한 권력의 편에서 국가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채웠다.


5.16 혁명과 6.10 민주화운동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국민들은 나쁜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와 용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독재의 출현을 기 위해서는 엘리트 집단의 동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들 계층은 머리와 경험, 그리고 지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일부 엘리트 선각자들은 늘 있어 왔지만, 안타깝게도 엘리트 집단이 주체가 되어 사회변혁에 성공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은 이번 탄핵시위에 대거 참여한 MZ세대의 재발견이다. 방에 처박혀 게임이나 하고, 연예인들이나 쫓아다니고, 젠더 갈등을 일으키고, 불평불만만 가득하다는 이미지는 나 같은 기성세대의 착각이자 편견이었다. 이들은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도 탄핵봉을 흔들며 시위현장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나는 이들 깨어있는 젊은 세대의 집단지성을 믿어 보기로 했다.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가진 엘리트 계층이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되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 이제부터 나는 아들이 속해 있는 MZ세대의 편에 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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