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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Aug 07. 2024

마일리지를 기부하는 사람들


"메신저님은 언제 오시나요?"

병색이 깊어 보이는 노인은 의사나 간호사를 볼 때마다 같은 질문을 했다.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모든 환자들은 '메신저'라고 불리는 사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뒤 한 중년 남자가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몇몇 환자들이 그를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메신저님, 드디어 오셨군요!"


메신저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차례대로 방문했다. 먼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을  찾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노인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메신저는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노인이 보유하고 있는 마일리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멋진 삶을 사셨군요. 선생님은 백만 마일리지를 보유하고 계십니다. 전액 기부하시겠습니까?", "예.. 기부하겠습니다" 노인 목소리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느껴졌다. 메신저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노인의 손을  잡아주고는 다음 환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노인이 기부한 백만 마일리지는 사망 시 예상되는 유산(마일리지)을 기부 가능한 점수로 환산한 것이었다. 유산에는 약간의 통장 잔액, 사망 보험금, 연금 잔액 등과 같은 금전적 자산 외에도 무형자산에서 발생한 마일리지 중 미사용 잔액을 환산한 점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형자산봉사활동, 기부행위, 이웃에 베푼 선행, 수입에 비해 초과된 노동 등의 행위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재산이나 재능기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살아생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물론 눈앞에 른거리는 천국행 티켓에 대한 기대 또한 기부를 부추기고 있었다.




기부를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은 신앙이 생긴 이래로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천국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쩌다가 문이 열리는 날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문입구는 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문은 삽시간에 닫혀 버렸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 영혼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천국행 티켓을 두고 가난한 사람들과 경쟁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천국의 문 앞에 아무나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까다로운 기준을 만들기로 했다. 기부 금액의 크기 순으로 천국행 티켓을 신청할 수 있다는 장치를 걸어 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큰 기부를 하거나, 신의 소리를 전파하거나, 혹은 살신성인의 희생을 한 경우에만 기부 행위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일반 대중들은 마일리지를 쌓을 능력이나 여유가 없었고, 천국은 지배 계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하지만, 천 년을 버티던 기부 제도는 용기 있는 선각자들에 의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국행 마일리지 시스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행위라면 대단한 선행이나 공덕이 아니어도 마일리지를 쌓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꾼 것이었다. 재능과 지식 혹은 미덕과 선행 만으로도 얼마든지 천국에  있는 자격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 하지만,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천국은 여전히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다시 천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다시 한번 기부 제도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 메신저라는 사람이 나타나 마일리지 적립 방식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펼치면서 기부 제도는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메신저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마일리지를 찾아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일상의 삶 속에도 수많은 종류의 마일리지가 발생하고 있었다. 일과 취미, 놀이와 휴식을 통해 생산된 에너지 중 사용하지 않고 남는 에너지는 모두 마일리지로 쌓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하루 만보를 걷는 사람이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데 필요한 에너지로 7 천보를 사용했다면 나머지 3 천보는 마일리지로 쌓이는 식이었다. 베푼 것과 받은 것의 무게를 비교해 베푼 것이 조금이라도 더 많으면 식사 한 끼에도 마일리지가 발생했다. 이태리에서는 커피 한잔으로 기부(caffe' sospeso)와 동시에 마일리지까지 쌓고 있었다. 마트의 포인트, 커피 쿠폰, 항공사 마일리지까지 사용하지 않는 모든 적립금은 기부가 가능한 마일리지로 전환할 수 있었다.


노동량에 비해 자신이 받는 최저시급에 불만이 많던 아르바이트생은 매일 적립되는 자신의 잉여 마일리지를 알게 되자 신바람이 났다. 무료 플랫폼에 꾸준하게 글을 올리고 있는 작가 지망생은 글 한 편 쓸 때마다 마일리지가 쌓인다는 사실에 창작 욕구가 새롭게 솟구쳤다. 많은 사람들이 수입에 비해 초과 노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잉여 노동력은 고스란히 마일리지가 되어 적립되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는 평균 수명까지 살았을 때를 기준으로 환산한 마일리지를 가족들에게 돌려주었다. 시장통에서 분식집을 하며 모은 전 재산을 장학재단에 기부한 할머니의 마일리지는 무려 1억이 넘었다. 이러한 사례는 없었다. 사회 전체로 보면 엄청난 양의 마일리지였다.


물론, 모든 사람이 마일리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마일리지 잔고가 마이너스이거나 도리어 갚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생의 마지막 순간 마일리지 잔고가 정확하게 제로인 사람도 있었다. 마일리지가 생길 때마다 곧바로 소진하는 바람에 남아 있는 마일리지가 없었던 것이다.




메신저가 불러일으킨 기부 제도의 혁신 덕분에 이제는 누구나 천국행 티켓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얻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은 노동을 투입하면 마일리지가 생긴다는 이치를 깨닫기 시작했다. 부자가 아니어도,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세상의 찬사를 받을 정도의 선행을 베풀지 않아도 마일리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노력과 열정이 있는 삶에는 어김없이 상당한 액수의 마일리지가 쌓이고 있었다.  


메신저의 혁신은 사람들의 일상까지 바꾸어 놓았다. 따분하고 무료했던 일상이 활력으로 넘쳐났다. 팍팍하고 고달팠던 삶이 보람과 희망으로 가득 찼다. 마일리지를 쌓는 재미에 빠져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더없이 행복했다. 어두웠던 지난날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늙고 병들어 초라한 말년을 보내면서도 기부할 마일리지가 있다는 사실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설사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세상에 이로운 뭔가를 남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어느새 사람들의 관심은 천국행 티켓보다는 기부행위로 옮겨가고 있었다. 자신이 기부할 수 있는 마일리지가 얼마인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마일리지를 적립할 수 있는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면서, 독서를 하면서, 자선냄비에 지폐 한 장을 넣으면서 마일리지를 생각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마일리지를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흡사 천국행 티켓을 손에 쥔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에 더 큰 만족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바로 천국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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