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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Sep 18. 2024

토요일 저녁에는 아내와 회식을 한다


토요일 저녁은 우리 부부가 회식을 하는 날이다. 나에게는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는 특별한 날이기도 하다. 회식 메뉴를 정하는 일은 아내의 몫이. "돈 걱정하지 말고 당신 먹고 싶은 걸로 정해" 나는 아내에게 이 말을 할 때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이 난 아내는 여기저기 검색을 하다가 동네 먹자골목에 있는 식당 하나를 선택한다. 아내는 술은 못 하지만 다행히도 술과 어울리는 음식을 좋아한다. 삼겹살과 회를 좋아하고 매운 어묵탕과 마른오징어를 즐겨 먹는다.


토요일 회식은 타협의 산물이다. 아내는 내가 집에서 혼술을 하거나 외식을 하면서 반주하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다. 왠지 고달프고 처량하게 보인다고 한다. 아내의 고정관념에는 막노동자, 독거노인, 알코올 중독자 등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마시려는 사람과 말리는 사람, 누가 이기든 그날의 식사 분위기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술의 양이 아니라 마시는 빈도였다. 모임과 회식이 크게 줄어들면서 나도 모르게 혼술과 반주가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술을 두고 벌인 아내와 나의 오랜 실랑이는 일주일에 한 번, 소주 한 병만 마시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회식을 시작한 후 한동안은 금요일 저녁에 회식을 하였다. 불금의 들뜬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년의 부부는 금요일 저녁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아내는 예약 타이밍을 놓치기가 일쑤였고, 교통체증에 도착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에는 직장 회식이나 친목 모임이 많은 편이다. 이들이 뿜어내는 왁자지껄한 대화소리와 웃음소리는 맞은편에 앉은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데시벨이 높다. 아내와 나는 무언가에 떠밀리듯 금요일 저녁에서 슬그머니 탈퇴하고 말았다.


한편, 가족 단위의 손님이 많은 토요일 저녁은 차분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다. 어린 자녀들을 동반한 가족, 부부 동반, 같은 아파트에 사는 듯한 중년의 여성들,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나온 젊은 커플도 눈에 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한 남자는 MZ 세대로 보이는 두 아들에게 주도를 가르치고 있다.


모르는 얼굴들이지만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연대감과 마실 복장의 소박함에 정겨움이 느껴진다. 여름철 마실에는 반바지에 슬리퍼가 어울린다. 여자들은 당연히 노메이크업이다. 화장한 얼굴은 마실 분위기를 망칠 뿐만 아니라 마실 나온 이웃에게도 예의가 아닌 것이다. 예의 바른 아내는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늘 걱정이다. 



편안한 분위기와 적당한 취기는 부부의 대화를 길게 이어준다. 회식 자리답게 두 사람은 직장 얘기를 많이 한다. 주로 아내가 푸념 섞인 질문을 하고 멘토를 자청한 남편이 위로 섞인 답을 하는 이다. 직장 생활 5년 차인 아내는 업무와 대인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힘들어할 때가 다. 직장 생활 30년 차인 보기에 별것도 아닌 일로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평생 악기만 다루던 사람이 전공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나는 술을 마실 때마다 안도현 시인의 '퇴근길'을 건배사처럼 읊조리곤 한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 아내는 이 짧은 시를 수 백 번도 더 들었을 것이다. "술 마실 때 오빠(아내는 아직도 나를 이렇게 부른다)가 왜 이 시를 읊어대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얼마 전에 소주를 한 잔씩이나 들이켠 아내가 한 말이다.


대화를 하고 싶어 술을 마시는 것일까, 아니면 술을 마시기 위해 대화를 하는 것일까? 젊었을 때는 술과 대화의 구분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할 얘기가 많았고 술이 달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할 말은 여전히 많지만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나 또한 단맛보다는 짠맛이 더 묻어나는 누군가의 술잔에 공감할 만큼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술이 고파서 아내와 회식을 시작했다. 술로 시작한 회식이지만, 지금은 아내와의 대화를 위해 술을 마신다. 내가 마시는 술은 소주 한 병이지만, 우리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양은 소주 몇 박스와 맞먹을 것이다.


토요일 저녁 해가 질 무렵, 아내와 나는 집에서 식당까지 걸어가면서 애피타이저 대화를 나누고, 술을 마시면서 메인 대화를, 그리고 식당에서 집까지 다시 걸어가면서 디저트 대화로 마무리한다. 다음 회식 메뉴는 오랜만에 내가 정하려고 한다. 간이 작은 아내가 힐끔 거리며 지나치기만 했던 맛집으로 소문난 한우식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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