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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익썬 Oct 14. 2022

차녀 이야기 01. 출생신고

태어나자마자 6개월 시한부?

1978년생, 박정희 정권의 말기. 그 때를 살았던 이들은 그 때가 말기 였는지 몰랐을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헌법으로 통금이 있던 그 시기에 나는 태어났다. 난 1월생이다. 그런데 주민등록상에는 7월생이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내가 차녀여서였다. 

차녀. 

나에겐 언니가 있다. 언니는 전형적인 K-장녀이다. 의무가 너무 많은 장녀에게 차녀가 받지 못한 몇가지 혜택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출생신고이다.

언니의 출생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자그만한 자전거 가게에 일하던 키 작고 말주변이 없던 노총각이 봉제공장에 주6일 일하던 여공과 어느 일요일 오후에 다방에서 만났다. 해가 바뀐 1월에 노총각 부모의 성화는 대단했고 노총각은 못 이기는 척 다방 구석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렸다. 노총각은 다방 문으로 들어서는 얼굴이 하얀 그녀를 보자마자 단숨에 마음에 들었지만 커다란 눈만 굴릴 뿐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가씨가 일어서 나갈 때까지 자리에 꼭 앉아 있었다. 키가 작은 게 들킬까봐 그랬다고 한다. 얼굴이 하얀 여공은 남자 키도 안 보고 덥석 결혼을 했고 서 있는 키가 똑같은 남녀는 만난지 한달만에 결혼을 하고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경주를 한 바퀴 돌고 방한칸을 얻어서 신혼을 시작했다.

그해 10월에 언니는 태어났고 언니가 태어난 날을 잘 기억해서 아버지는 부리나케 출생신고를 했다. 얼굴이 하얀 엄마가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눈만 크고 마르다 못해 나무꼬챙이만큼 한참 마른 아기를 낳았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가장 이쁜 아기였다. 

부리나케. 단 한치의 지체함도 없이. 생명의 탄생 그 자체의 기쁨에 들뜬 아버지의 즐거운 첫 출생신고였다.

그리고 몸이 좋지 않던 아내가 몇번의 유산 끝에 다시 아기를 가졌다.

산달이 가깝지도  않았는데 배가 남산만 하다고 사람들이 놀렸다. 남산이라고 해서 서울의 남산을 떠올리면 안된다. 내가 사는 이 도시에도 남쪽에 있는 산을 남산이라고 했다. 하여튼 그 남산인지 모르겠지만 두번째 아기는 남산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비유(어찌 인간의 뱃속의 아기가 인간보다 더 큰 산만할 수 있다니 인간들의 허풍은 끝이 없다.)만큼 컸고 칼날의 서슬보다 더 시퍼런 시어머니는 첫 아기를 낳은 후 4년동안 매일 고추 타령을 했기에 둘째는 무조건 사내아기여야 했다.

차녀.

그런 엄청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너무 커서 너무 힘들게 출산을 한 둘째는 어머니의 몸에 큰 생채기를 내고 세상에 나왔음에도 그 중요한 고추를 달고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구박이 시작되었다. 아니 구박은 결혼하자마자 있었다고 한다. 혼수가 별로라고 여공이라고 배운게 없다고 그리 받았던 구박이 이제 아들을 못 낳는다는 치명적인 결함까지 더 해서 더 심한 구박이 내려졌다. 힘들게 출산한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생닭을 잡았다. 할머니가 그 닭을 넣어서 미역국을 끓였다고 했는데 어머니의 상에 있는 미역국에는 닭껍질과 누런 국물밖에 없었다고 한다. 

기름 둥둥 뜬 미역국처럼 나는 그런 존재였다. 

이름이 없었다.

선량하고 점잖기로는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할아버지가 언니의 이름은 단 3일만에 지으셨으면서도 나의 이름은 지어주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나를 낳은 것이 실패 그 자체였고(실패라고 한 이유는 차후에 후술하겠다.) 할머니에게는 먹고 살기 힘든 형편에 사랑하는 아들의 등에 올려진 커다란  짐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국가가 나에게 이름을 지어줬다.

당시 나처럼 무작정 출생신고를 늦추는 아기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쩌면 요행을 바란 부모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행이라는 단어가 부적합할 수도 있겠다. 다행이라는 표현을 하기에는 나와 맞지 않아서 말이다. 나의 출생신고가 늦어진 것은 당시 의료상황이 안 좋아서 태어난 아기 중 많이 죽는 경우가 있어서, 어쩌면 나와 언니의 4년차라는 간극 사이에 그런 비극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님은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단지 내가 잘 살지 몰라서 였단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내심 죽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2kg을 겨우 넘겨서 의사가 살지 못살지 모른겠다고 한 언니의 출생신고는 지체없이 이루어졌지만 4kg에 가깝게 태어난 나의 출생신고는 살지 못살지 몰라서 늦게 출생신고를 했다는 부모의 변명은 지금 생각하니 논리는 어디 갖다 팔아먹은 거짓말이었다. 이미 딸은 하나 있고 바라는 아들이 필요한데 딸이 하나 더 느는 것은 경제적으로 너무 큰 부담이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하얀 거짓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요행은 일어나지 않았고 국가는 6개월 늦은 출생신고에는 벌금을 물리기로 했다. 내가 1월에 태어났음에도 아버지는 나라가 정해준 6개월을 넘겨서도 나의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 아니 나란 존재는 집안에 알람시계 였던 건가? 아침에 눈 뜨면 울고 배고프면 울고 끼니를 알려주는 알림시계 같은 존재가 아니라면 응당 새생명이 태어났고 그 생명에게 이 나라, 대통령이 있지만 독재국가 같은 한 대통령이 통금을 만들고 머리 길이를 관리하고 여자의 치마 길이를 정해주는 그런 빌어먹을 나라에 국민이 되는 것에 대한 반항심이었던가? 하여튼 꼬물대는 생명이 집안에 있는 강아지와 달리 같은 인간이었음에도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무신경한 게으름에 섭섭하고 온 가족이 출생신고를 했는지 안 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나의 축복받지 못한 출생의 그늘에 자기연민에 빠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살지 죽을지 모른다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해대는 부모가 나의 아버지만 있었던 게 아니었나 보다. 왜냐하면 현재의 출생신고 기한은 1개월 만30일이이다. 태어난 날로 딱 30일 내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5만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한달보다 엄청 긴 6개월의 기한. 머리카락부터 치마길이까지 심지어 사람의 머릿속까지 개조하고 통제하고 싶었던 박정희 정권이 출생기한에 대해서는 이렇게 호혜를 베풀다니! 그 호혜의 이면에는 나처럼 얼마나 많은 여자 아기들이 요행처럼 죽거나 키우지 않아도 되는 상황(입양을 보내거나 버려지거나 같은 끔찍한 상황만 떠오르네) 을 국가가 판을 깔아준 것이다.  사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1가정 2자녀라는 산아제한을 엄청하던 시기였다. 2자녀 중 반드시 아들은 있어야 하는 뼛속까지 남아선호사상에 지배당하는 대구에서 차녀라는 단어존재부터 무슨 과태료 고지서보다 더한 형벌이었는지 모른다. 그 형벌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기 싫어  아버지는 고모가 던져 준 이름을 들고 동사무소로 뛰어갔고 이미 지나가버린 6개월은 처음부터 나란 존재가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어쩌면 태어났지만 가족들 내 아무도 반겨하지 않은 그 상황이라면 태어나지 않은 것 같은 것이니 내가 없었던 것처럼 6개월도 없어지고 그래서 난 7월생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나는 시누이의 나이를 물었다. 시누이의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나는 시누이가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일을 겪었는지 6개월이 지나 출생신고를 했고 해가 바뀌는 바람에 주민등록상 한 살 어리게 되었다. 6개월 늦게 출생신고하는게 그 때 트렌드였나 보다. 뭐가 그리 먹고 살기 바빴는지 자식의 출생신고도 6개월이 지나 할 수 밖에 없었던 건망증이 많은 부모들이 많던 시기였나 싶기도 하면서 그 출생신고가 차녀인 나와 둘째로 태어난 시누이에게서 일어난 선택적 건망증에  못내 섭섭했다. 

6개월의 기한 속에 국가의 국민으로 인정되지 못했던 차녀들에게 그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진짜 살지 죽을지 몰라서 그 당시 의료상황이 안 좋으니 그럴 수 있다고, 하도 인구가 많고 출생이 많아서 행정업무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서 그럴수 있다고, 경제발전이라는 엄중한 목표 아래에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럴수 있다고. 많은 이유를 누군가 들 수도 있겠지만 왜 그 일이 유독 선택적으로 차녀에게 일어났을까? 6개월이면 몸을 뒤집어서 온 집안을 기어다니는 람보르기니 저리 가라의 속도감의 포복의 달인이어서 아빠의 발뒤꿈치를 열심히 추노했을 것인데 말이다. 


대구에서 차녀가 태어난 공포감이 6개월의 시한부 인생에 버금갈 만한 공포었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말처럼 살지 죽을지 몰라서 말처럼 말이다. 박정희 정권의 말기도 몰랐을 만큼 혹독하고 까마득한 세상에서 4kg에 육박하는 아기가 살지 죽을지 아버지는 몰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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