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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익썬 Oct 31. 2022

차녀이야기 04. 1978년생과 1980년생

투명한 벽 너머에 그와 나

1978년생인 나와 1980년생 남동생 사이에 아주 커다란 강이 흐르는 것 같다. 지금도 티비에서 MZ세대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거기에 1980년대생은 스리슬쩍 넣는거다. 그래 뭐가 젊다는건지 2년 차이 밖에 안 나는데 그와 나 사이에는 엄청난 벽이 있다. 그 큰 벽을 넘어서 그는 태어났고 난 그 큰 벽안에서 태어났다.

박정희

1979년 10월 26일 운명을 달리하신 분. 그 분을 엄청난 벽으로 만들어 준 조력자 할머니가 있었다.

"니는 꿈이 대통령이데, 니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대통령님이 돌아가신 기라. 할매는 그래서 니가 고추 달고 나올줄 알았다."

아니 이 무슨 귀신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차녀의 6개월 늦은 출생신고 같은 트렌드였다. 1980년에 태어난 남자 아기들의 숙명, 그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모두 하나의 꿈을 가슴 속에 품고 태어났어야 했다는 것. 내 동생도 역시 이 꿈을 숙명처럼 안고 태어났다. 할머니는 무속인도 아닌데 자신의 손자가 존경하는 대통령이 떠난 그 황망한 해에 며느리의 뱃속에 있다는 이유로 손자는 그 분처럼 되기를 바랐는지, 정말 대통령이 되어서 후손 팔자를 바꾸고 싶었는지 할머니는 항상 그 말씀을 하셨다.

"니는 대통령님이 돌아가신 후 태어난 기라."

18년 5개월을 집권한 대통령은 어쩌면 삼일 운동을 보고 자란 할머니에게 단 하나의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하나의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태어난 손자에게 세뇌를 하듯 말한 내용은 어쩌면 정말 대통령을 존경했을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해서 피 한방울 안 섞인 대통령이 심지어 성도 다른데 고작 비슷한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대구에 태어난 내 남동생에게 현신할리도 없는데 이건 무슨 정도령이 세상을 구하다는 정감록 같은 말도 안되는 예언이었지만 할머니는 주문처럼 잊지 않고 틈틈히 내뱉으셨다. 아니면 할머니의 또다른 권력욕, 야심일 수도 있겠다. 대통령 하나 만들어 보자. 이 평범한 소시민의 가정에서 대통령 하나쯤은 나와야 한다는 거창한 욕심일 수도 있겠다. 

무속적 바람이든 세속적 욕심이든 뜬금없는 박정희 대통령 타령은 그 시대를 살았던 나의 할머니 세대에게 박정희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 산과 같은 대통령인 줄 말해준다. 왕만 알던 시대에 겨우 민주주의가 자리잡았지만 여전히 불안했던 시대에 박정희라는 막강한 권력자가 18년을 넘게 집권했으니 할머니에게 대통령이라는 단어는 왕이라는 단어와 동일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박정희를 존경했고 왕에 버금가는 존재로 생각했다. 할머니에게 오직 하나 뿐인 대통령이었으니 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겪었을 할머니의 혼돈은 세상이 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정말 할머니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었다.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다고! 그런 무시무시한 시기에 며느리의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가 고추를 달고 나오기를 믿는다면 그것만큼 빠른 안정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남동생은 안타깝게도 아직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다. 사십대라 세상일은 모른다지만(가능성은 제로에 수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남동생은 그렇게 거창한 꿈을 꿀 그릇이 아니었다는 것. 할머니는 아셨을까? 

그 특별한 꼬리표를 달고 태어난 1980년생.


그리고 전두환

뭐 대통령 바뀐게 1978년생과 1980년생의 큰 차이에 들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 합천 출신 전씨에게 감정이 있다. 그가 나의 인생에서 중요한 곳을 만들어 주고 없애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바뀌는 게 한 개인의 인생에 큰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 일은 차후에 후술하겠다.)

국민학교 때 티비순이였던 나는 밤늦게 광주에서 총을 들고 다니는 군인들의 영상을 봤다. 나에게 어려웠던 아버지였지만 그 때 용기를 내서 물었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알았느냐고? 대구에 사는 아버지가 광주에 저렇게 큰 일이 있었는지 알았을까? 그 질문에는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무언의 분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의도를 아셨는지 답변은 짧았다.

"신문에 광주에서 폭도들이 나타났다는 이 짧은 한 줄만 있었지. 그게 저런 상황인지 몰랐다."

아버지의 답변 만큼 짧은 한줄. 신문 읽기를 좋아하셔서 첫 줄부터 끝줄까지 꼼꼼히 읽었던 아버지가 기억하는 단 한줄. 그것도 십년이 지나서 물은 국민학생 딸에게 해 주신 기억. 단 한줄의 기사가 말해 주듯이 전두환 정권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일들을 숨겼다. 그리고 철저하게 차별했다. 스무살 때 광주에 갔었을 때 같은 광역시인데 대구와 달리 좁은 도로와 번화가라고 하기에도 민망했던 도심 중심가를 거닐었던 기억이 난다. 

철저하고 처절한 차별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미워해서 이루어지는 차별과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애정해서 이루어지는 차별. 광주와 나는 닮은 듯 다른 차별 속에 있었다. 광주가 전자라면 나는 후자에 있는 차별이었다. 단지 광주가 미움의 대상이었다면 나는 애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애정의 대상은 내 남동생이었고 난 2년 아래 남동생과 철저하고 처절한 차별을 겪으며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거기에는 합천 출신 전씨 대통령이  있었고 합천 출신의 전씨 사위를 가장 애정하는 할머니가 있었다.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차별은 받는 당사자에게 처절하다. 광주라는 지역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정비되지 않은 도로와 불편한 교통과 부족한 사회 기반 시설를 겪어야 했고 나 역시도 먹는 것, 입는 것, 가지고 싶은 것 등 기본적인 욕구까지 무시당하거나 차별당해야 했다. 눈 뜨고 잠들때까지 이루어지는 철저한 차별은 나를 처절하게 만들었다.


외환위기

 외환위기는 1997년 겨울에 왔다. 나는 97학번으로 외환위기 이전 대학과 이후 대학이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 몸소 느꼈다. 같은 잔디였는데도 1997년 봄의 잔디와 1998년 봄의 잔디 색이 달랐다. 어떻게 같은 잔디인데 말도 안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1997년 강의를 빼고 잔디에서 술을 마시고 자빠지고 하느라 잔디는 눌러 붙어 있거나 술에 쩔어 있었다. 하지만, 1998년 그 잔디에는 그 누구도 앉아서 술을 마시며 노가리를 깔지 않았다. 봄이 되었고 신입생이 들어왔지만 교정은 조용했다. 아무도 앉지 않고 어떠한 토사물과 알코올도 섭취하지 않은 1998년 잔디와 수많은 엉덩이에 짓눌리고 심지어 알코올까지 섭취했던 1997년 잔디는 때깔부터 달랐다. 둘 다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나는 잠시나마 외환위기가 없던 대학의 낭만을 즐기던 마지막 세대였고 1980년대생 엄밀히 말하면 1979년생들에겐 그런 기회조차 없었다. 98학번 입학생 중에 대학 입학금이 없어 대학을 포기한 학생이 많았을 정도로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 


1978년생과 1980년생  우리  둘 사이에 벽이라고 몇 자 적어 보았지만 사실 그 벽은 대통령이나 경제위기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니었다. 여자와 남자라는 극복할 수 없는 성별이 대구라는 보수적 사회에서 자라야 할 나에게 준 숙명같은 차별의 벽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남녀 떠나 이런 사회적 변화가 '나'라는 인간이 차녀로 태어나는 바람에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 누릴 수 있던 것들을 나는 누릴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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