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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익썬 Nov 11. 2022

차녀이야기 07. 사투리 심한 아이

가깝고도 먼 할머니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사투리를 쓰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또래들에 비해 사투리도 많이 쓰고 억양도 크게 도드라지고 된소리로 발음하는 단어도 많다. 너무 사투리가 심해서 어떨 땐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더 긴장이 되고 실제로 나의 툭 튀어나오는 선명한 사투리로 빙긋이 웃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많았다.

1980년대 티비가 많은 가정에 보급되었고 나보다 4살 많은 언니도 나만큼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유독 나만 심한 사투리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엄청난 컴플렉스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의 그 묘한 발음을 흉내내는 친구들도 있었다. "넌 왜 오이를 오^이 라고 해?" 그만큼 내 발음은 대구사람들에게도  별났기에 가따나 의기소침해지기 일쑤인 나는 친구들 앞에서 용기내어 말을 하다가도 이내 입을 다물기도 했고 한동안은 말하는 게 싫을 때도 있었다. 나의 발음이 그렇게 된 이유에는 한창 말하기를 배우는 서너살 시기에 나의 양육자였던 할머니 덕분이었다. 양육자인 할머니와 동거동락하니 한창 말 배울 시기에 사투리가 심하게 형성되었다. 


난 거의 할머니 껌딱지였다.

 나를 정말 좋아하는 할머니라 껌딱지가 되었다면 정말 이상적인 그림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를 키우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보낸 시골은 나를 온전히 키워 줄  상황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림을 하는 이는 아버지의  또 다른 남동생, 삼촌이었다. 삼촌은 제대로 된 교육지원도 받지 못했다. 장남만 아들로 생각하는 편협한 할머니는 없는 살림에 아버지는 중학교 시절 대구로 유학을 보내고 끝끝내 대학 근처에라도 가게 지원을 해 주었지만 삼촌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고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혼을 해서도 시골 깡촌에서 농사만 지어야 했다. 숙모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큰 딸은 나보다 한달 먼저 태어났고 둘째딸은 나보다 20개월 뒤에 태어난 아기 였다.  갓 태어난 아기와 24개월짜리 유아, 그리고 아침부터 밤까지 허리 필 시간도 없이 살림과 농사를 짓고 있던 숙모에게 또 한명의 23개월짜리 유아가 온 것이다. 여기는 체계화된 어린이집도 아니고 국가에서 지원을 해 주는 보육원도 아니었다. 그저 일년치 농사를 지어 근근히 먹고 사는 시골 깡촌의 초가집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집에 시숙네 아이 하나가 온 것이었다. 아직 똥오줌도 가릴 줄 모르는 아이가 하나 더 온 것이었다. 대구 사는 형님 즉 나의 엄마는 아들이라도 낳았는데 딸만 둘 낳아서 몹쓸 구박을 다 받고 있을 숙모에게 여자아이가 한 명 더 온 것도 모자라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시어머니와 함께 온 것이다.  

그 차디찬 공기를 3살짜리가 몰랐을까? 삼촌은 겉으로는 순둥이에 착한 아들이었지만 그 가슴 한구석에는 부모의 애정이 고픈 성인 아이였다. 둘째로 태어난다는 것. 3살 짜리인 난 삼촌의 눈빛에서 아들이지만 두번째로 태어난 이들이 겪은 무언의 결핍을 은연 중에 느낄 수 있었다. 삼촌은 그저 나를 멀리서 바라만 볼 뿐이었고 나 역시도 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고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온 나를 불쌍하게 봤을까? 자신의 또 다른 모습처럼 생각했을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보던 아빠의 눈빛과 다른 남자 어른이라는 것을 알았다.  두 딸을 무릎에 앉히고 나를 바라보는 삼촌의 눈빛은 어떨 땐 차가웠다. 삼촌에게 형은 어떤 존재였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분노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은 진짜 모른척 하는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장례식장에서 삼촌과 아버지 사이의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삼촌의 분노는 내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깊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아버지는 삼촌의  차별의 대상이고 부모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존재였으니깐 말이다. 그런 형의 딸은 항상 데면데면한 존재로 거리를 두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숙모의 모습은 항상 굽은 등이거나 쪼그리고 앉은 자그마한 등이었다. 아궁이에 부지깽이를 넣어 아침 밥을 짓거나 냇가에서 빨래를 하거나 텃밭에서 허리 굽혀 농사를 짓는 모습. 삼촌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큰 키에 지게를 메고 좁은 산길로 들어가거나 지게 가득 나무를 해 와서 떨어지는 땀과 함께 쪼그려 앉던 모습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 두 분께 애정어린 눈빛까지 바란다면 나는 몰염치한 아이이다.

그리고 사촌언니와 동생. 한달 먼저 태어난 사촌언니랑은 어울려서 놀았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이 어울려 놀았을 거라는 짐작이 든다. 그건 내가 자라서 국민학생이 되어 방학 때 간 시골에서 사촌언니가 나를 얼마나 애정했는지, 그리고 우리 둘이 어떤 관계였는지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후술하겠다. 

  어떻게 놀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같은 또래의 우리는 어울려 다녔고 사고도 같이 쳤다. 할머니는 항상 아기를 업고 있었고 사촌언니와 나를 눈으로 노려보거나, 입으로 잔소리하거나 소리치거나 하면서 돌보고 있었다. 걸어다닐 수 있는 3살 무적의 아기 둘은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기가 일쑤였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가 어쩌면 내가 하여튼 우리 둘 중 누군가 장독을 깼나 하여튼 엄청 큰 사고를 쳤다. 저녁 무렵 굴뚝에는 나무 타는 냄새와 잘 익은 밥 냄새가 났지만 나와 사촌언니는 밥을 먹지 못하고 흙바닥 마당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노기탱천한 할머니가 화를 내고 회초리로 우리의 등과 어깨를 마구잡이로 때렸던 기억이 난다.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조절하며 때때로 마당을 바라보는 숙모의 슬픈 눈빛과 마루에 누워 잠시 눈을 감고 있던 할아버지. 지게에 나무를 가득 지고 왔던 삼촌이 마당에 들어서며 소리를 치고 지게를 내팽게치고 사촌 언니를 안았던 순간. 그 순간 할머니의 회초리는 멈췄고 할머니는 삼촌 아니 숙모를 보고 쓴소리를 했다. "가시나들 오냐오냐 키우면 안된데이. 쓸모없는 가시내들은 초장에 버릇을 고치야 한데이"  그 순간에도 나는 투명인간인 것처럼 철저히 혼자였다. 혼을 나도 돌아가 안길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난 언제나 그런 할머니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 능력이 없으셔서 자식들에게 무엇하나 제대로 지원해 줄 수 없는 할아버지는 집안에 종이호랑이였고 시어머니라는 직함은 신이 하늘에서만 있는 게 아니고 땅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할머니는 모든 권력과 분노의 정점에 있었고 자식들은 할머니의 말 한마디와 심사에 하루가 좌지우지 되었다. 이혼은 죽어서 하는 거라고 배운 어머니 세대의 숙모는 참는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삼촌은 여전히 어머니의 애정을 갈구하는 어른 아이였다. 그 공간에서 나는 생존이라는 엄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치를 챙겨야 할 뿐이었다. 

삼촌과 숙모는 말이 없었다. 나에게 말은 걸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거기서도 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 분들은  항상 먼 발치에 있었고 먹으라면 먹고 자라면 잤다. 나의 모든 사소한 문제 해결은 스스로 하거나 사촌 언니를 따라하거나 어쩔 수 없이 할머니에게 부탁해야 했다. 가시나를 무지 싫어하는 할머니였지만 난 그분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나의 대화 상대와 창구는 할머니뿐이었고 3살 짜리의 아둔한 정치적 시안에도 권력자의 등에 업히는 수 밖에 없었다.

권력자인 할머니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을 적으로까지 생각할 정도로 미워했다는 것이다. 피가 섞이지 않은 며느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절대 쉬어서도 안되는 존재였고 어떠한 고마움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였고 행여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집안에 사람을 잘못 들여서라고 말하며 그 모든 원흉을 며느리에게 돌렸다. 

난 사랑보다는 미움을 먼저 배웠다. 누군가를 마냥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데 누군가를 먼저 미워해야지 세상이 편해지는 것을 가까이서 배워야 했다. 할머니의 미움의 대상을 나 역시도 멀리 하고 고마워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영리한 개들도 가족 내 서열을 안다고 했듯이 3살짜리도 어렴풋이 가족내 서열을 알았을 수도 있고 매일 밤 할머니 옆에 잠들면서 할머니의 뒷담화를 듣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할머니 편이었다. 그건 생존의 방법, 처세였는지도 모른다. 어떨 땐 할머니의 끝모를 미움으로 나와 사촌언니에게 분노의 회초리와 매질이 있었지만 난 그 고초가 끝난 후 다시 할머니 품에 안길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의 회초리는 일종의 쇼였다. 진짜 때리고 싶은 이는 며느리였고 차마 남의 집 딸은 때리지 못하니 그 딸이 낳은 딸을 때릴 수 밖에 없었다. 할머니에게 맞아도 할머니에게 안길 수 밖에 없는 아이와 할머니에게 맞고 엄마에게 안기는 아이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눈 떠서 잠 들때까지 같이 놀았지만 사촌언니와 나는 평행선 위에 있었다. 


나와 할머니의 동거는 껌딱지라고 동화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생존의 방법, 정치적 처세에 가까운 냉혹한 현실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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