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갓집에 다녀왔다. 게임이 좋은 아이는 상갓집에 가야 하는 사실이 너무 귀찮고 억울하기까지 하지만 좋은 일에는 안 가도 궂은일에는 가야 한다지 않는가. 아이는 조금 컸다고 왜 상갓집에는 검은 옷을 입고 가야 하나 묻는다. 그러게 우리는 왜 검은 옷을 입을까? 가족을 잃은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밝고 화려한 옷대신 색이 없는 검은 옷을 입는 거라 설명하긴 했지만 굳이 검은 옷인 이유가 있을까 싶다.
서양의 상복은 시대, 나라에 따라 다양했다. 고대 이집트시대에는 노란색, 로마시대에는 어두운 파란색을 입었고, 페르시아인들은 갈색, 집시들은 빨간색, 14~5세기까지는 초록색이나 진한 파란 옷을 입었다. 영국 빅토리아여왕이 남편의 장례식(1861)에 입은 검은 옷을 계기로 검은색 상복이 정착되었다. 검은 옷을 입으면 망자가 알아보지도, 쫓아오지도 못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기도 한단다.
조선시대 상복은 본래 삼베옷의 광목색이나 흰색으로 더 좋은 곳으로 가라는 염원과 출발의 뜻이 담겨있었다. 근현대 의복이 유입되며 우리나라도 검은 상복이 정착되었다는데 정확히는 1934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의례춘식'을 발표하면서다. 일제가 조선의 장례법이 지나치게 번잡하다며 만든 규정이다. 전통상복인 굴건제복을 생략해 두루마기와 두건을 입고 왼쪽가슴에 나비모양 검은 리본을 달도록 했다. 왼쪽 팔에 검은 완장을 다는 것도 조선총독부 의례춘식에 따른 것이다. 고 이건희 삼성회장의 영결식에서 평소 전통에 대한 이해가 깊던 부인 홍라희씨와 가족들은 흰 상복과 검은 정장을 입고 완장도 하지 않았다. 일본 상복인 모후쿠도 검은색 무지 기모노인데 과거 일본의 상복도 모두 흰색이었다가 메이지시대(19세기 후반~ 20세기 초. 일왕 무쓰히토의 재위기인 1867-1912년)이후 검은색이 되었다 한다. 스스로를 아시아의 유럽으로 여기던 일본의 영국 따라하기가 우리나라까지 전해진 듯하다.
조문객들도 검은색이 주는 느낌 때문에 슬픔을 함께하고 애도하려 검은 옷을 주로 입었다고 한다. 요즘은 너무 밝지 않은 무채색은 괜찮은 듯 하지만 말이다.
얼마 전 TV프로'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에서 마다가스카의 장례, 추모행사를 본 아이는 웃고 춤추면서 즐기는 밝은 분위기를 기억하는 듯했다. 알록달록한 색의 옷을 입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온몸으로 박자를 타며 즐거운 잔치처럼 함께 하는 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슬프지 않게 위로하기 위해서라 했다. 방법은 다르지만 위하고 함께 하려는 마음은 한 가지다. 물론 그 속에서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가족은 있다. 제 몫의 삶을 다 살아내지 못하고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헤어진 경우. 아직 어린아이의 죽음 앞에서 오래도록 슬퍼하는 부모가 있었다. 밝은 분위기의 풍습이 그들에게도 위안이었을까?
상갓집에 아이는 굳이 데려오지 않아도 괜찮다 했다. 요즘은 더욱 아이는 상갓집에 데려가지 않는 추세인 듯하다. 어린아이가 민감하기 때문이거나 나쁜 영들이 붙을 수도 있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 그저 우울한 분위기에 아이들을 데려가는 게 교육상 좋지 않다는 마음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오히려 상갓집일수록 아이를 데려가야 한다 싶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죽음은 몇 안 된다. 태어나는 수만큼의 죽음이 우리 옆에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고 가까운 소수의 사람들과의 경험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중학생 때 아는 누구의 아버지가 사업실패로 자살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인과 그 가족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금세 잊혔다. 대학생 때 수업을 듣던 교수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조금 더 큰 파장으로 우울함을 느꼈다. 사람은 누구든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지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며칠이 지나면 일상으로 돌아왔다. 고등학생 때 겪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는 그런 인식이 없었다. 호상이라는 게 과연 가능한 말인가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좋으신 할아버지가 손주들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계셔주셨고 큰 병치레 없이 돌아가셨다.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지 못해 상실감이 크지 않은 탓이었겠지만 이를 계기로 만나는 친척들이 반가웠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소중함을 느꼈다. 성인이 되어 결혼, 출산을 하고 할머니의 상을 맞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가장 가까운 자식과 함께 노후를 보내시다 떠나신 할머니. 아주 오래까지는 아니지만 치매증상인 할머니를 챙기시며 마음 쓰시고 또 조금은 힘들어했던 부모님. 이제는 정말 천애고아로 남은 부모님의 슬픔과 막막함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부모님의 상황이 될 때를 그려보게 됐다. 나는 정말 이 분들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한 살 차이 친했던 대학선배의 병사를 보며 다시금 느꼈다. 죽음은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다. 그러니 미리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아이들과 함께 장례식장에 있을 때 슬픔이 희석되고 희망이 자라는 것들을 느꼈다. 상실은 슬프지만 이는 또 새로운 삶으로 연결된다. 당신들의 삶이 흘러 이 새로운 생명이 살아가는 기반이 되었음을, 어떤 삶의 주기, 순환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슬픈 마음에 동심의 온기가 닿으면 잠시나마 위안이 되고 평안이 된다. 억지스러운 즐거움의 포장이 아니라 그냥 순수함과 밝음이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들에게도 작은 배움이 될 테다. 이것이 삶의 고리이고 누구나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거란다. 이건 멀리 떨어진 일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도 아니야. 외면한다고 없어질 것도, 준비하고 예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 그러나 반드시 슬프라는 법은 없는 것 같아.
일련의 상황을 겪던 20대에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다. 평소 TV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데 우연히 본 드라마의 장례식이 너무 밝고 행복하게 그려져 있었다. 가만히 넋 놓고 보다가 내 마지막은 저랬으면 좋겠다 싶었다. 나를 아는 모두가 와서 나를 기억하고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다. 따뜻하고 밝은 노래가 들리고 그땐 그랬지 라며 서로 즐거이 이야기 나누고 웃음도 맘껏 터트렸으면 좋겠다. 나 역시 조문 온 사람들에게 영상으로 내 마지막을 축하해 줘서 고맙다는 감사인사와 내가 먼저올 줄 몰랐지만 다음 차례를 기다리겠다며 농담도 건네고 싶다.
그리고 혹시 아나. 죽음 이후의 순간이 더 행복하고 화사할지. 하얗고 검은 가보지 않은 사람들의 편견 대신 나의 생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거다. 닫힌 문을 열고 지나간 이후의 일은 모르니까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힘들어하기보다 즐거움으로 기대하는 거지. 혹시 아니더라도 어때? 걱정하다 맞는 주사가 더 아픈 법인데.
삶이 사랑스러운 만큼 죽음 또한 만족감이란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그래서 더욱 오늘에 충실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