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겨울방학 뒤 종업식을 마쳐서 이제 새학기까지 온전한 방학이 남았다. 물론 방과후수업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아이는 1학년 1년간 돌봄 교실의 혜택을 받았다.
4교시 혹은 5교시 수업을 마치면 돌봄 교실에 가서 급수표별 받아쓰기를 하고 수학문제집을 푼 뒤 요일에 따라 바뀌는 예체능수업을 했다. 방과후가 있는 날엔 방과후수업을 먼저 다녀온 뒤에 돌봄 과정을 했다. 그리고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태권도차를 탔다. 간혹 다른 일이 생기면 먼저 나오긴 해도 일정하고 꾸준하게 루틴을 지키다 보니 이제 그 일과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엄마가 일을 잠시 쉬면서 이젠 맞벌이가 아닌 탓에 새 학년 돌봄 교실은 신청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만큼 집에서 봐주면 안 될까 싶었다. 방학이지만 오전에 규칙적으로 방과후수업을 가기 때문에 이참에 연습해 보면 되리라 싶었다.
물론 순조롭진 않다. 집은 쉬는 곳이고 집에 있으면 늘어지는 건 애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라 집에만 오면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며 쉬고 싶고 놀아야 할 것도 너무 많다. 엄마 눈엔 다음 학기를 준비할 기회건만 아이에겐 공부를 안 하고 맘껏 놀 기회라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나 역시 공부 압박이 거의 없이 자란 탓에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강요하고 싶진 않지만 무작정 놀리기엔 시간이 아깝고 생산적인 놀이도 아니라 마음이 불편하다.
어떻게 하면 서로 낯 붉히지 않고 학습을 꾸준히 이어 가 볼까 생각하다 역할놀이를 시작했다.
이름하여 돌봄 교실 놀이.
-ㅇㅇ아, 방학 때 돌봄 교실 안 가는 대신에 집에서 돌봄 교실 하는 거 어때?
-응
-그럼 이제 여기 돌봄 교실이야.
학생. 내복만 입고 학교 왔어요?
-네. ㅋㅋㅋ
-안 부끄러웠어요? 옷 입고 오세요. 에구. 세수도 안 했네. 세수도 하고 오세요.
-안 부끄러운데요. ㅎㅎㅎ
-어서요.
-네.
호다닥
-자. 1교시는... 뭐 하는 시간이야?
-선생님 그것도 몰라요? 받아쓰기잖아요.
-아항. 그럼 받아쓰기해야지.
-에이. 이 책 보려고 했는데.
-응? 좋아. 그럼 이걸로 받아쓰기다!
인터넷에 도는 받아쓰기 급수표가 있긴 하지만 어차피 즐겁게 하는 거라 아이가 손에 쥐고 있던 포켓몬도감을 집어 들었다. 포켓몬 그림과 특성이 나와있는 게 뭐 그리 재미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몇 시간 동안 하나하나 외워가며 보던 책이다. 끝까지 안 쓴 1학년 노트 빈 장에 아이가 받아 적었다.
-자. 부른다? 1번 타오르는 불꽃
2번 파워를 발휘한다
3번 옹골찬 턱
4번 우격다짐
5번 철분이 축적된
6번 흉포한 성격
7번 피뢰침 ...
띄어쓰기가 조금 틀리긴 하지만 아이는 대부분을 맞추며 뿌듯해했다. 한글 마스터는 안 돼도 포켓몬 마스터는 되겠다.
-여기 틀린 부분 고쳐서 한 번만 쓰세요.
-히잉. 쓰기 싫은데.
-돌봄 교실에서는 어떻게 했어?
-두 번 썼어.
-엄마는 한 번만 쓰라고 봐주는 거잖아.
-힝. 알았어.
다 썼어요. 선생님. 아. 3번 읽어야 되지?
따로 읽으란 말은 안 했지만 아이는 돌봄 교실 하던 대로 공책에 1, 2, 3을 적어놓고 읽으면 동그라미를 했다. 말하지 않아도 척척, 돌봄 교실의 힘은 대단하다 싶다.
그리고 2교시. 공부 관심은 많아서 사놓고 평소 아이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눈치만 보며 못 풀리던 사고력수학 문제집을 당당히 내밀었다.
-잘했어요. 2교시는 수학시간입니다.
-예~ 수학시간이다. 선생님 몇 장이나 풀어요?
-요기까지 3장?
-너무 많아요.
-아니야. 봐봐. 문제 다 하면 열몇 개 밖에 안 돼.
-음... 오케이.
평소 풀어보지 못한 낯선 형태의 문제라 이해하기 어려워했지만 다시 문제를 읽으며 구해야 하는 것, 나와있는 정보들을 찾아보게 했더니 "아하. 쉬운 거네?" 하며 풀었다.
-다 풀었어요. 선생님.
-전 지금 바쁜 일이 있어서 선생님이 이거 채점 좀 해주세요.
하고 아들에게 답안지를 내밀었더니 "힛. 그럼 내가 채점해 볼까?"라며 선생님 역할에 빠져들었다. 해설을 차근차근 읽으며 빨간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촤악촤악 시원하게 그리다가 만난 틀린 문제.
-(선생님놀이에 만취한 아들) 앗, 이거 잘못 셌네.
학생. 이거 틀렸으니까 고치세요.
-(흠칫한 엄마) 아. 선생님, 이거 제가 푼 게 아닌데요. ㅇㅇ이한테 틀렸다고 알려줄게요. 이거 선생님이 틀렸다고 고쳐오래.
-(능청연기 만점 아들) 그래? 아. 이게 틀렸네. 자. 여기 고쳤어.
스스로 채점을 하니 엄마 일도 줄고, 스스로 읽어보고 이해하니 왜 틀렸냐 다시 생각해 봐라 잔소리하지 않아서 좋다. 물론 문제 푸는 내내 옆에 앉아 도움을 구할 때마다 힌트를 주긴 하지만. 식을 제대로 다 풀고도 문제를 찬찬히 안 읽어서 답 순서를 잘못 적은 경우엔 "다 알았는데..."라며 스윽 지우고 고쳐서 맞다고 동그라미를 하기도 한다. 틀렸다고 문제에 사선을 좌악 긋는게 아니라 틀린 문제에 밑줄 그어 표시하고 다시 맞게 풀면 더 힘차게 동그라미를 그려주는 것도 돌봄 선생님께 배운 거겠지. 덕분에 문제집엔 동그라미만 가득하다. 한 문제 몇 점이란 계산도 없이 열몇 문제 중에 하나 틀리면 90, 두 개 틀리면 80이라 적긴 하지만 가득한 동그라미에 자신감 탱천이다.
미술시간은 엄마랑 같이 유튜브를 보며 종이접기를 하고 체육시간은 아이가 선생님이 돼서 몸을 움직인다.
-엄마, 여기가 이제 강당이야.
학생. 선생님 따라 하세요. 하나 둘 셋 넷.
-선생님 너무 어려운데요.
-천천히 따라 하면 됩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자유시간. 오전 반나절을 아이와 뚱땅거리며 보내면 마지막 시간쯤이면 뻗어서 일어나기 싫기도 하지만 아이는 매사 뭐 그리 즐거운지 쉴 새 없이 키득대며 즐거워한다. 아직 남은 2월을 헤아리며 개학이 기다려지는 게 사실이지만 아이가 큰 어려움 없이 즐겁게 꾸준한 일상을 지켜가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엄마표 돌봄 교실을 꾸려갈 수 있는 기반을 닦아주신 돌봄 교실 선생님께 박수를. 돌봄 교실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