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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Dec 10. 2024

햇살같은 만남

하우스메이트 Claire

V&V walsh에서 일한 지 두어 주쯤 지났나? 비어있는 방에 다른 한국 여자애가 들어온다고 Amy 아줌마가 알려줬다. Amy 아줌마와 같이 소를 다루는 방에서 일하는 Claire라고 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이 많지 않지만 한인들 사이에서 손예진을 닮은 외모로 꽤나 소문이 자자했는데 난 한 번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아직 우중충한 분위기를 많이 벗지 못한 터라 연예인을 닮은 예쁜 외모에 어울리는(?) 까칠한 성격일까 싶어 괜히 주눅 들어있었다.



Claire는 동갑이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햇살같이 밝고 살가웠다. 당당하고 똑부러져서 어려움이라곤 하나도 안 겪고 자란 듯해 보였다. Amy아줌마와 친하다더니 사람들을 격의 없이 대하고 친화력도 좋아서 나와도 금방 친해졌다. 집에서 딱히 말할 일 없이 방에 처박혀 있다시피 했던 내가 말이 통하는 편한 친구가 생긴 덕분에 하루하루가 조금 더 생기 있어졌다. 같이 밥을 해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호주는 한국보다 베이커리 재료들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어서 마트 베이커리를 사는 대신 만들어 먹는 일이 잦았는데 우리는 같이 베이킹에 취미가 붙어서 수시로 쿠키를 굽고 머핀을 굽고 케이크를 구워댔다.

 

Claire는 나보다 먼저 워홀을 와서 호주 남부를 거쳐 오며 농장일도 하고 이미 꽤 시간을 보낸 후였다. 호주에서나, 한국에서나 아르바이트로 안 해본 일이 잘 없을 정도로 보기와 달리 싹싹하고 강단 있고 생활력이 있는 친구였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내면이 단단해진 친구라 순간순간 반짝반짝 빛났던 것 같다.



Claire는 밝은 분위기로 때론 언니처럼, 때론 엄마처럼 챙겨 주곤 했다. Claire가 차가 없었기 때문에 외출할 때는 내가 종종 기사가 되었는데(평소 출퇴근은 Amy아줌마와 함께 했다) 목요일 쇼핑데이에는 같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보거나 식당에 가서 기분을 내기도 했다. 그동안은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도 감지덕지였는데 같이 차려입고 타이 음식점이나 중국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주문해 보는 호사를 누렸다. Claire는 한국에서 발레를 해서인지 패션, 뷰티(발레분장을 많이 해본 터라) 등에도 타고난 센스가 있었다. 그래서 같이 옷구경을 다니기도 했는데 이것저것 어울리는 옷을 골라주기도 하며 날 인형삼아 인형놀이도 했다. 종종 화장도 해주며 말이다.



한 번은 금요일 밤에 클럽에 가보재서 같이 나갔는데 한국의 클럽을 생각하고 11시쯤 갔더니 막 문을 열고 아무도 안 온 썰렁한 분위기라 한참 동안 둘이서만 춤을 추며 놀았다. 새벽녘이 돼서야 사람들이 조금씩 들어왔고 매너 없는 손들에 먼저 지친 나는 차에서 기다리며 자고 있기도 했다. 혼자라면 갈 생각도 않았을 곳인데 그래도 덕분에 즐거운 기억이다.



우리는 둘 다 입이 거친 편은 아니어서 욕을 하는 일은 잘 없는데 한 번씩 참을 수 없는 일이 터지곤 했다. 갑자기 일어난 자연재해 같은 일들, 예상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부닥친 여러 가지 불쾌한 일들 앞에 Claire는 "썅!" 하고 외쳤다. 이쁘장한 입에서 찰지게 터져 나오는 그 소리를 처음 듣고 무척 당혹스러웠는데 평소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 모를 카타르시스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카타르시스를 느끼려 종종 따라 하곤 했다. 왠지 그렇게 한 마디를 뱉고 나면 화가 가라앉고 피식 웃음이 다.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Claire가 그렇게 외쳐주면 든든한 빽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다행히 지금은 이마저도 끊었다.)



글을 쓰려 다시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반년 이상 같이 지낸 줄 알았는데 고작 4개월? 만 3개월 밖에 보지 않았다니! 먼저 귀국하던 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짧은 만남이 1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여전히 마음을 터놓고 지낼 정도로 깊어질 줄 알았을까. 경직되어 있던 내가 그곳과 그 분위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준 친구. 항상 고마워.


표지 이미지: UnsplashMorgan Se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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