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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Feb 13. 2024

정전

you are it.




정전이다.


"안 무섭드나? 있어 봐, 금방 환하게 해 줄게."


퇴근한 남편이 부산을 떤다. 물론 영어로 말했지만 어차피 내 나라 말도 아니고 내게 익숙한 톤으로 렌더링 한다.


집안 구석구석에서 캠핑 조명들이 하나 둘 소환되고 어두운 가운데서도 먼지가 폴폴 날리는 것이 감지된다. 분답다. 나는 하나도 안 무섭고, 하나도 안 환하고 싶으며, 갑작스레 선물 받은 이 어둠이 내심 마음에 들고 있었다.


'당신이야 말로 좀 가만있어줄래?'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또 참는다. 사랑은 오래 참고, 자꾸 참고, 또 참는 것이다.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도록 놔둔다.


온 세상이 캄캄한 와중에 캠핑조명을 거실에 두르자 실내의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싱그러운 바람이 솔솔. 역시 맘대로 하도록 놔 두길 잘했어. 이래서 인생사 새옹지마야... 이번 새옹지마는 결과 발표가 10분 만에 났네?


소파에 누워 은은한 빛에 기대 책을 보는데 남편이 내 머리에 헤드랜턴을 씌우러 온다. 눈 베린단다. 물론 남편은 ‘어두운 조명에 책을 보면 시력이 저하된다.’고 말했지만. ‘눈 베린다’고 써야 내게 일말의 울림이 있다.


남편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편안한지를 살피는 버릇이 있는데 - 백화한 팬옵티콘이랄까 - 이를테면 이런 거다. 명절에 거실에 우르르 드러누워 영화를 보는데 그중에 누군가 베개가 없잖아? 그럼 살모시 일어나 그 사람 머리에 베개를 꽂는 거지. 지금 내 머리에 헤드랜턴 씌우는 것도 그런 결로 보면 된다. 그리 살다 보니 사람이 항상 은은히 지쳐있다. 나는 항상 은은히 미쳐있고. 합치면 태극기 된다.


눈이 망할지언정 어둠을 즐기고 싶었으나, 또 꾹 참고 순순히 머리를 대주고 있는데 남편이 요즘 꽂혀있는 취미 활동이 시작됐다. 바로바로 나와 대화하기!


"둘 중에 하나만 골라야 돼, 알았지?"


“어.”


"전제주의에서 살래, 아님 무정부국가에서 살래?"


"(질문 못마땅) 일단 그게 왜 궁금한데?"


"이게 우리 현실이라서. 올해 총선이야."


총선 얘기로 시작해 신혼 때 자주 싸웠던 얘기, 최근에 읽은 책, 노후 준비 등등, 의식의 흐름을 주거니 받거니 한참을 떠들었다. 그러다 난데없이 남편이 표정을 바꾼다. 이내 던져진 하나의 공안,


"20대 때 가졌던 뜨겁게 살아있는 그런 느낌이... 요즘은 잘 들지가 않아. 당신은 어때?"


(잠시 정적)


"... 그래서 마음이 안 좋아?"


"음... 안 좋다기보다는 그냥 그 마음을 다시 찾고 싶어."


(더 깊은 정적)


'다시 찾긴 뭘 찾아. 얘는 또 무슨 사람 억장 무너지는 소릴 하고 있어...‘ 화가 난다. 그러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대답 대신 남편 얼굴을 길게 바라보았다. 고개를 떨구고 남편 손을 꼬옥 잡는다. 그의 한 손을 내 두 손으로 움켜쥐고 한참을 쓰다듬는다. 화가 다 날아가고 사랑만 남을 때까지. 내 눈엔 버젓이 보이는 이 인간의 온전함을 스스로 못 보는 것 같아 목구멍이 확 쪼그라든다.


"당신 자체가 지금 뜨겁고, 살아있고 난리가 났는데 뭘 그런 느낌을 따로 찾으려고 하는 거야? 당신 자체가 지금 '그때'야 여보, 모르겠어?"


"당신은 예민하니까 그런 걸 잘 느끼지만 나는 노력해도 잘 모르겠어."


"뭘 노력을 해, 당신 자체가 지금 그거라니까? 20대 때 보다 지금 당장 내 앞에서 더 빛나고 있는데 이게 안 보여? 왜 그때의 감정을 기준 삼아? 지금 더 좋은 게 와 있잖아!"


남편 표정이 점점 더 굳어진다. 또 까먹었다. 메시지가 아니라 진동수! 다시 동그랗게 말해본다. 동그라미가 정답이라서가 아니라 이 사람이 동그라미 좋아하니까 그냥 해주는 것이다.


“세게 말해서 미안해. 그냥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어. 옛날에 뜨거웠던 그 자리가 지금 여기 버젓이 있는 거(생글생글).”


그제야 미소를 머금고 끄덕이는 남편. 나는 매사 미루기를 좋아하는데 사과는 미루지 않고 잘하는 편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남편이 나와 반대 성향인 것도 다행이고. 나 같은 사람 만났으면 정전되면 그냥 둘 다 캄캄하게 있어야 된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재미는 덜하다. 여러 가지 재미 중에 요즘은 참아지지 않던 일이 참아지면 재밌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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